• 최종편집 2022-12-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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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예비 대통령’을 둬야 할지도
    언제부턴가 대학의 입학 사정에서 예비합격자 제도가 생긴 것 같다. 합격자가 등록을 포기하거나 어떤 사정이 있어 입학생에 결원이 생길 경우, 예비합격자들로 그 결원을 보충하는 것이다. 비단 대학 입학생들만이 아니다. 기업체의 신입사원 선발에 있어서도 그렇다. 최근 들어서는 아파트 청약에서도 예비자를 뽑아 만약의 경우 미계약자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는 것 같다. 일면 좋은 점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 최근의 우리나라 사회 일각에서 발견되는 ‘대통령 물러나라’는 구호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이러다가 대통령까지도 예비 당선인을 여럿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좀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문명이 발전한 나라일수록 대형 사고나 사건 또한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현실일진대 그때마다 대통령이 물러나야 할 것 같으면 대통령도 예비 당선인을 많이 두거나 아니면 아예 한번 선거할 때 여러 사람을 뽑아서 번호를 부여해놓고 순서대로 한 사람이 물러나면 다른 한 사람이 뒤를 이어 취임을 하는 순번제가 비용도 줄이는 등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다.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은 지금도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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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1
  • [사설] 창조주의 권리인가, 인간의 권리인가?
    그냥 듣기에도 대단히 민망한 말이지만 이 말이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곧 우리 사회에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근자에 열린 한 학술세미나에서 발제된 ‘생명윤리와 기독교’에 올려진 주제를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별히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자들이 강하게 주장한 ‘낙태’와 ‘존엄사’ 문제가 관심을 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단지 세상에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害)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느냐 하는 것과 그것을 합법화하는 것이 생명윤리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한 한국교회법학회 서헌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주체가 각 개인인지 창조주 하나님인지를 두고 논란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말과 같이 평소에 깊이 담아두지 않았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창조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음과 동시에 또 다른 생명을 창조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그 소중함의 경중이 서로 다를 순 없는 것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한을 인간의 법으로 제한한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가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오랜 세월 유지해온 낙태를 죄로 인정하는 법을 헌법재판소라고 하는 인간사회의 권력기관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과 불순종을 드러낸 과오(過誤)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자칫 우리 사회가 낙태권을 합법화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현대 사회가 컴퓨터에 의한 컴퓨터의 시대라고 말들 하지만, 인간의 생명조차 컴퓨터에서 작성하다가 단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간단히 삭제해버리고 마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은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으로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10:29참조)는 진리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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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1
  • [사설] 어떤 종교 지도자의 기도
    근자에 어떤 종교 지도자의 기도와 SNS(사회적 관계망)에 올린 글이 적지 아니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것 같다.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최근 G20 정상회의 등의 일정으로 해외 순방에 오른 대통령의 전용기가 추락해 사망하기를 기도하자는 내용을 올렸다는 것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해당 교단(敎團)에서는 면직이나 정직과 같은 행정적 처리를 했다고는 하나 성직자가 취할 처신은 아닌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자신의 이념과 철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해외 순방을 나간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을 그런 식으로 저주하고 선동하는 행위는 결코 국민적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그 대상이 대통령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겨야 할 성직자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 될 심성이 아닌가 한다. 다시는 종교인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거나 강단에 서서는 안 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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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8
  • [사설] 잊고 살아온 단어 ‘감사’를 회복하자
    대단히 유감된 일이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잃어버린 단어가 하나 있다. ‘감사’라는 말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학생은 스승에게,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국민은 정부에, 그리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 비난이 더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감사’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건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감사’를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에게 좀 오래된 이야기이자 생소한 얘기일는지는 모르지만 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에서 있었던 어느 인기 연예인의 경험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시로서는 미국 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한 연예인이 2차대전 참전 용사들 위문공연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연예인은 자신의 스케줄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무대에 서는 시간이 10분 이내여야 한다고 조건을 붙여 출연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기획된 프로그램에서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순서였는데, 막상 공연이 진행되고 마지막 순서로 이 사람이 무대에 나갔을 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애초의 약속은 출연시간을 단 10분 이내라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으나 이 연예인은 약속된 공연시간을 넘기고도 30분이나 더 무대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고 한다. 마침내 공연을 마치고 내려온 이 연예인에게 기획자가 왜냐고 물었다. 이 사람은 말없이 객석의 앞줄을 가리켰다. 객석 앞쪽에는 두 명의 참전 용사가 앉아 있었는데 둘 다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오른쪽, 다른 한 사람은 왼쪽 팔이 없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각자 남은 한쪽 팔을 서로 부딪치며 매우 기쁘고 감사하는 표정으로 공연 내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스케줄이 바쁘다는 단순한 이유로 공연을 짧게 끝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의 장기를 다 보여주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양팔을 다 가지고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팔 하나를 가지고도 박수치고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사례이다.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 전혀 없다는 이들에게 ‘감사는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잊고 살아온 단어 ‘감사’를 회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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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8
  • [사설] 교회는 바벨탑만 쌓고 있었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사회, 참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우리 사회를 이르는 말 이다. 패자(敗者)에 대한, 2등에 대한 배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회. 극소수의 선택받은 젊은이들 말고는 이 나라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기를 펴고 살아갈 수 없는 지금의 사회구조가 이번 이태원 참사에 이르게 된 원인이 아닌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숨 막힐 듯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일까? 젊은이들을 그 숨 막히는 우리에서 풀어놓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충분했던 시간들이었다고 본다. 뒤늦게 ‘누가 잘못 했냐?’, ‘아무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등등의 말은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든 면해보겠다고 하는 사회 지도층의 비열 함에 불과하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남을 배려하는 사회라면 모두가 나서서 ‘내가 잘못했다. 내가 죄인이다.’ 하는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믿는 자들의 자세일 것 같다. 믿음, 그 믿음의 자세이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면 바른 정신문화 를 가르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말하면 매 맞을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우리 사회는 지금 올바른 정신문화 가 사라지고 없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오래전에 분별력을 잃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중(重)하고 덜 중한지 분별없이 육신의 쾌락과 기쁨을 좇 아가는 ‘무리’에 불과하다. 믿는 자들의 믿음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믿음이 바로 서 있으면 적어도 육의 생각만을 좇아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언제부터 핼러윈 축제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왜 그것이 필요한가를 먼저 파악해볼 수 있도록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쳤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소망이 없어졌으나 교회는 살아서 소망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마저 젊은이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젊은이들이, 후진들이 자라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른 믿음’ 교육을 통해서 바 른 정신문화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런 데도 교회의 중직을 맡은 자들마저도 ‘얘가 정신이 있나 없나? 지금이 어느 땐데 공부해야 할 시간에 교회를 가다니?’ 하고 야단치고 윽박지르는 분위기에서 교회 교육이 살아날 리가 없다. 흔히들 믿는 이들의 가정에서조차 ‘교회는 때가 되면 갈 수가 있는 거야, 지금은 대학 입학이 더 중요해’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순서를 한참 거꾸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時>라는 것, 교회 다닐 때가 언제인가? 자녀들이 세상 가치관에 물들어서 분별없이 날뛸 때, 세상 마귀 사탄의 궤계가 이미 우리 자녀들의 정신세계를 다 점령하고 난 다음에는 때가 이미 늦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런 대형 사고가 난 다음에 가서야 ‘정부는 뭐하고 있었느냐?’ ‘대통령 물러나라.’ ‘장관이 책임져라.’ 하며 목청 높이고 TV 화면에 나와 핏대 세우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나’를 바로 가르쳐야 한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가장 큰 문제는 누구의 문제일 것 같은가? 교회가 문제이다. 교회는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을 위해 교회 가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 세상을 위해 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진리를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흔히들 교회가 뭐 좀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콧방귀도 안 뀌는데 무얼 하겠느냐고 반문한다. 흔히 하는 말로 ‘지들이나 잘하지…’. 교회가 그만큼 신뢰를 잃었다는 얘기다. 교회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 세상은 돌아보지 않고 바벨탑만 쌓아온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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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0
  • [사설] 우리 사회 좀 진정성 있게 나아가자
    우리나라는 국민성이 그리 자부심을 가질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희한한 민족인 것 같다. 정치권만 보아도 편 가르기 아니면 상대방 헐뜯기, 거기에다 요즘 들어 부쩍 가짜 뉴스를 양산해 내어 선량한 사람을 욕보이는 것까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같다. 사회 또한 어느 한구석도 온전해 보이지는 않는다. 비방과 모함이 멈추지 않는 사회가 정상은 아니다. 사회 지도층에서부터 비방과 불법이 판을 치는 나라, 이 사회가 정상일까 싶다. 이 땅이 정상이 아니라는 증좌로 보이는 것이 근자에 무인도 하나가 경매로 나온 일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전라남도 신안군의 어느 무인도가 경매로 나와 5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응찰하여 감정가의 30배 금액에 낙찰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만큼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무언의 외침이 아닐까 한다. 제발 좀 진정성 있게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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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3
  • [사설] 핼러윈, 어느 나라 풍습이길래
    그렇게 목숨을 걸고 참여를 한 것은 결코 아니겠으나, 결과는 엄청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남들이다 모이는데 나만 빠지면 뭐가 되느냐는 식으로 덩달아 참여한 젊은이가 적지 않았을 것 으로 짐작한다. 도대체 핼러윈 (Halloween)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고 그렇게 들떠서 거리를 메우고 소리를 지르고, 또 그것을 즐기는지 좀체 이해하기가 어렵다. 본래 핼러윈은 천주교의 축일인 만성절(萬聖節)이라고 알려졌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축일(祝日)은 결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유래를 설명하는 글에는 옛날 유럽의 스코틀랜드 켈트족의 미신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날은 음식을 준비하여 죽음의 신에게 제사를 올림으로써 죽은 이의 혼을 달래고 악령을 쫓았다는 설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해서 이 문화가 미국에까지 전파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마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어떤 유학파에 의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까지 우리가 낯설게만 여겼던, 정확히는 말로만 들었던 핼러윈이 그 본고장보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더 성대하게 축제를 연다 하는 말이 사람을 속상하게 한다. 이번에 150여 명의 아까운 생명을 잃게 만든 서울의 핼러윈 행사는 참으로 두고두고 생각해도 비통한 심정이다. 왜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국적도 불분명한 축제를 즐기느라 생명까지 잃어야 했을까를 생각하면 괜히 원통한 마음도 든다. 천주교의 축일에서 출발했다는 설(說)이 있다고는 하나 우리가 볼 때는 분명 귀신의 장난이고, 마귀의 놀음일 뿐이다. 이 어수선한 세상을 귀신이 세력화하느라 그동안 곳곳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마귀들의 어처구니 없는 문화를 만들어오고 있었던 것이 사실 아니냐고 묻고 싶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그러한 귀신의 세력화 내지는 저질의 문화를 완전히 끊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뜻과도 완전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번 참사가 더 유감스럽고 우려스러운 것은 이제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세월호의 아픈 기억을 다시 불러냈다는 점이다. 조용히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야 옳을 것 같은데 무슨 욕망이 그리 많아 정치적으로 그것을 이용해먹으려고 하 는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핼러윈 축제가 남긴 귀신의 소 란이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멈출는지 걱정이 앞선다. 지금은 누구의 잘잘 못을 따질 때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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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3
  • [사설] 잦은 북한의 도발 유감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가 북한에 대해 호 의적인 탓인가 아니면 북한이 우리를 볼 때 좀 만만해 보여서인가 정확하게 판단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거나 새 정부가 들 어선 이후 북한의 도발이 좀 잦은 것 같다. 뭔가 좀 경제적으로 어렵고 손을 벌려야 할 때만이라도 좀 공손해지고 솔직 해지는 것이 세상사 이치인데 영 그렇지 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국민의 정서로는 약간의 불만족 스러운 일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함께 국제연합(UN)에 동반 가입한 국가(?)라면 하나의 국가로서의 신뢰가 기틀이 되어야 할 것이나 전혀 그것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말썽을 부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세계가 다 알고 있는바 북한은 식량난을 비롯해서 총체적으로 경제난이 심각한 처지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이는 북한의 인민들뿐일 것이다. 북한은 지금 자신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될리는 만무임을 알 텐데도 불구하고 연일 미사일에 방사포에 온갖 무력도발을 일삼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연일 들려오는 도발 소식에 우리가 과연 같은 민족인가 하는 사실조차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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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7
  • [사설] 세상을 위한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성경을 아직도 다 못 읽어서일까?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말들은 하면서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2~17)에 빠져 있는 목회자들이 많은 것 같다. 무엇을 자랑하겠다고 그 많은 단체와 조직을 만들고, 이생의 자랑을 더 늘어놓고 싶어 장(長)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이 ‘한국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되레 ‘그래서 당신이 빠져주면 좋을것 같다’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돈다. 과연 그래서 교회는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근자에 우리나라 교회의 대표적 연합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어느 기관의 대표회장이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70평생 살아오는 동안 한국 교회가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본다’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가 지금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으로 ‘세상은 종교 없이 살아도 종교는 세상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마음을 찌른다. 즉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버림을 받고 있다는 현실 상황에 전율마저 느낀다. 그 전율의 중심에 왜 우리는 이렇게 이생의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어할까 의문이 자리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라고 하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세상 어디에서나 차용증 없이도 급전(急錢) 몇백만 원 정도는 빌려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목사’라는 신분을 아무리 강조해도 은행 문턱에서 문전박대를 받는다. 교회가 신용을 잃은지 오래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집단이 교회라는 악담을 들어서는 아니 될 텐데 정작 교회는 아무 감각조차 없는 것 같다. 교회가 신뢰를 잃은 가장 근본이 되는 이유는 오늘날 목사들이 아무도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고 죽겠 다고 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하는 생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지금의 한국 교회 정서로는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교회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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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7
  • [사설] 세계 10대 강국 유감
    최근 미국에서 발간되는 US News지가 세계 10대 강국의 순위를 발표했다는 소식이다. 이 소식이 특별히 이번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의 순 위가 일본과 프랑스, 이스라엘 등을 누르고 제6위에 이름을 올렸다는 데 있다. 특별히 민족적 감정으로 말하자면 일본 이 우리보다 2단계나 아래인 여덟 번째 이름을 올린 것은 심지어 고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꼭 그러한 순위를 보고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 한편 마음이 좀 씁쓸하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순위를 선정하게 된 기준이다. 선정 기준에는 군사력과 무기 수출로 드러나는 방위 산업이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선정한 것도 아니고 국제적인 선정 기준이라니 더더욱 할말은 없지만, 차분히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면 결코 기뻐만 하기에는 뭔가 좀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은 것이 사실 이다. 한 나라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강국의 기준점이 된다면 이는 좀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군사력을 증강 시키지 못하면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도 강국에는 들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뭐냐 하는 점이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하는 살인 및 살상 무기를 많이 보유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방 위 산업도 그 선정 기준의 한 항목에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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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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