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이런 종교개혁 운동을 아십니까?

  • 입력 2018.10.15 09:43
  • 기자명 임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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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당시, 면죄부를 파는 가톨릭교회의 모습

501주년 종교개혁의 달을 맞았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은 실종되어만 가고 ‘개혁’교회의 간판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싶을 정도이다, 이런 때에 ‘개혁신앙’을 논하는 이들에게 종교개혁의 첫 걸음을 내디딘 이런 교회개혁 운동을 아십니까?라고 묻고 싶다.

종교개혁을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이가 그리고리 7세이다. 그는 북이탈리아 소아나 출신으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힐데브란트이다. 그는 어린 시절 로마로 가서 친척 아저씨가 원장으로 있던 성 마리아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 시대는 귀족이 아닌 계급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가 되는 길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 조반니 그라지아노가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면서 그의 보좌관이 되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면서 클뤼니수도원의 일원으로 교회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 때 세속적 지역영주와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성직의 매매와 처자식을 거느린 수도사 등이 개혁의 대상이었다.

청빈한 수도회운동은 많은 제후들과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하인리히 3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당시 왕이었던 하인리히 3세는 힐데브란트의 적극적인 개혁운동을 눈여겨보았으며, 그 왕의 손에 의해 교황자리에 오른 레오 9세는 힐데브란트를 로마로 불러들여 교회개혁운동을 맡겼다. 강직하고 완고한 성격의 힐데브란트는 교회개혁운동에 안성맞춤이었다. 개혁단체의 핵심이 된 힐데브란트는 교황 알렉산드르 2세의 재임기간 중에 막후 실력자가 되어 교회를 위한 헌신과 눈부신 활약에 압도적인 찬성으로 알렉산드르 2세에 이어 교황에 오르게 된다.

그레고리 7세로 로마 가톨릭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도덕적 개혁을 위한 자정운동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는 교회의 안정으로 일부 성직자들이 왕권과 결탁하여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교회내의 부패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왕권으로부터 독립하여야만 하며 교회는 교회 스스로 교회됨으로서 그 자체가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통일시키고, 이를 위해서 성직자의 규율을 확립하여 세속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그런 그의 개혁의지를 담은 27개조의 교황령을 내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성직매매 금지, 사제의 결혼금지, 속인의 주교 서임권 금지 등이 포함된 것이다.

1074년, 교회의 개혁과 성직자의 자정을 위한 도덕적 개혁의 나팔을 불었으니 로마에서 소집된 공의회에서 결혼 및 첩실을 거느리고 있는 모든 성직자들은 즉시 그들의 배우자를 떠나보내어야 함과 동시에 성직 후보생들은 영원한 독신 생활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교령(敎令)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 교령 가운데 가장 주의를 끄는 핵심은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결혼 금지였다. 당시 성직자가 처자식과 첩 등을 둠으로 친인척에 둘러싸여 바른 성직자의 길을 가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법령집속에 오래 있지만 지켜지지 않음으로 다시 주장한 것으로 그런 관행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다시금 그런 관행을 깨고 성직자 본연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하여 결혼과 성직 매매를 교회 내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고 공격하였다. 그 당시 주교가 되려면 지역영주나 왕에게 재물을 상납하여 성직을 사므로 그 자리가 많은 특혜와 이권이 있는 자리가 되어 자신이 물러날 때가 되면 그 직을 매매하거나 아니면 자녀들이나 친인척에게 세습하여 성직이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니 교회가 공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교회가 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공교회로 만드는 작업의 일환으로 도덕적 개혁운동을 선포한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일부 성직자들의 나쁜 도덕성의 일부분을 공격하였을 뿐이었고, 그 공격은 정당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그 당시의 총체적 죄악들로 인하여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해 가는 것이었다.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신선한 대안이었다. 신부(神父)나 주교가 아내나 자매가 아닌 다른 여자를 가지는 것을 금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혁명적인 칙령이 갑자기 시행되면서 많은 부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지만 특히 일부에서는 극력한 반대를 보이며 저항했다. 사도바울의 말을 빌어 독신의 은사가 있는 자에게만 금해야 한다는 등 반발하였다. 또 독일에서는 큰 소요가 일어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도덕적 개혁에 대한 교령을 시행하려고 시도했던 성직자나 교황의 사절들은 그들에 대한 공격의 분노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삼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고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많은 나라들에서는 폭력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레고리 7세는 단호했으며 얼마간의 교령을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도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요구 사항의 일점일획이라도 줄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펼치는 도덕적 개혁운동이 비상한 처방으로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을 예상하고 처음부터 평신도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이에 대비하였다. 그는 백성들과 신자들에게 결혼한 성직자와는 교제하지 말라고 열심히 권하였으며,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그러한 성직자의 결혼과 세습이나 성직매매 등 기능 수행을 필요한 경우에 물리력으로 막도록 지령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시작한 도덕적 개혁운동의 첫걸음에 탄력이 붙은 것은 경건한 수도사들의 동참이었다. 개혁적 동지들을 발견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결단과 헌신이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는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특히 독신 생활을 위하여 결단한 교령에 충실한 지지자들인 수도사들이었다. 그러나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보면 그레고리 7세, 그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부의 축적에 관심이 없는 외골수인 경건한 수도자였으며, 도덕적 경건을 다른 성직자들에게 요구한 극단적 개혁운동가였다. 그의 도덕적 개혁운동이 그 당시 사람들의 비난도 받았지만, 수도자 출신의 경건함과 정의로움, 뜨거운 열정과 강인함은 중세교회를 어두워져가는 교회에 한줄기 빛처럼 비치어 도덕적 개혁 운동을 일으키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렇게 도덕적 개혁운동을 일으킨 그는 이후 카놋사의 굴욕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에게 패하여 결국 유배되고, 1085년 5월 25일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였고 죄악을 미워하였노라. 그리하여 나는 추방생활 중에 죽노라’ 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 채 쓸쓸한 임종을 맞이하였지만 그의 도덕적 개혁운동의 발자취는 교회사에 길이 남아있게 되었다.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으며 교회개혁의 첫 걸음을 내디딘 그레고리 7세의 도덕적 개혁운동을 다시금 조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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