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기 매우 힘들지라도

  • 입력 2018.11.15 10:49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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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육신적 삶의 환경은 점점 더 척박(瘠薄)하고 메말라 갈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한 가지는 분명히 있다. 바로 감사의 언어와 찬양이 그것이다. 감사의 언어도, 감사의 찬양도 모두가 우리의 입술에 달려 있다. 우리 신체 중한 지체인 입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감사의 말과 찬양이 될 수 도 있고, 또 그와는 반대로 원망이나 불평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은 우리가 평소 감사의 말이나 찬양이 많은지, 아니면 원망이나 불평을 더 많이 쏟아내는지가 그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근자에 들어 교회 또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안으로부터 불평과 원망의 말들이 점점 많아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충분히 그런 불평이나 원망들이 표출되지 않을 수 없는 갖가지 요인들 또 한 적지 않다는 것도 모두가 새겨 둘 필요는 있다. 중요한 것은 불평이나 원망을 쏟아낼 수 있음직한 환경적 요인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과연 그런 것들을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점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노(怒)를 버리고 불평을 하지 말하고 권하고 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37:8)”고 한다. 바꾸어 말해서 감사와 찬양보다는 그와 반대의 것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것은 점차 인간성이 황폐해져감으로써 일어나는 오늘날의 사회적 현상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음으로 해서 오히려 분노의 도가 더해지고, 급기야 무고한 생명까지도 빼앗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단이 왕 노릇하는 세상 나라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 하나님이 왕이신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감사함이 늘 먼저여야 한다. 주변의 세상적 여건이아무리 감사를 드리기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입술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이 ‘감사’여야 할 것이다. 더불어 명심해야 할 것은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두루 찾아다니는 마귀에게 빌미를 주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원망과 불평이라는 사실이다. 근자에 들어 교회에서 점점 ‘감사’의 목소리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그 옛날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는 사실을 더욱 진지한 마음으로 묵상을 해봤으면 한다. 분명 우리에게도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이 어둡고 고통스런 세상을 넘어 더 깊고 거룩한 곳을 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때문이다. 돌아보면 지나온 한 해 역시 고통의 심연(深淵)이 결코 만만치 않은 해였다. 지금도 한국 교회에 적지 아니 고통을 안겨주고 있을 뿐 아니라 언제 그것이 치유 될 수 있을지도 모를 교회 내 성폭력의 아픈 상처, 이른바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 논란으로 불거진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도의 추락등 절망하게 하고 낙심케 한 일들이 적지 않은 해였다. 추수감사절은 감사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절기이다. 그러나 흔히 알고 있는 바처럼 들에서 거두어들인 것에 대한 감사만을 헤아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 모두가 감사해야 할 것들뿐이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음으로 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매우 힘들지라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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