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입력 2019.08.31 14:54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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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동욱 목사(예정교회) 

베드로전서 2장 9~10절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람들은 의식하든 못하든 마음속에 자기 모습을 담은 그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러지 않았을 뿐 모두 다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그림을 그는 사람은 화가라는 자기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있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가수라는 자기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의사는 의사로서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고, 주부는 주부로서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목사라는 자화상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 자화상에 따라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하고 상하기도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그냥 쪽지를 나눠주면서 동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껌 한통을 주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 편에서 보면 한 사람은 자기가 거지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장사꾼이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사꾼을 거지로 취급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화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반 고흐의 “자화상”입니다. 일반적으로 그의 자화상은 은둔형의 외톨이요. 알코올 중독인 이름 없는 화가요, 외롭고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고흐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화상이란 자기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실상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목회자였고, 고흐 자신도 신학을 공부하고 강단에 서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믿음으로 강단에 선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섰기 때문에 은혜가 없었고 삶의 변화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림에 몰두했지만 생전에 그의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은 후에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화상은 내 가슴속에 그려져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의 자화상을 점검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상처 입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영광스럽고 멋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소통하면서 살았기에 모든 것이 평화롭고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욕심이 들어가면서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순간, 그들의 자화상은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반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후 자신들의 모습을 보니 자화상이 상처 입어 벌거벗겨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일그러진 자화상을 무마시켜 보려고 노력한 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몸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넓적한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가렸지만 햇빛이 비취니까 돌돌 말려서 재대로 가려지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다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아담과 하와는 도저히 벗은 모습으로는 나타날 수가 없어서 나무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은둔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죄로 인해 자화상이 일그러지자 그들은 비열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 준 여자가 자신을 꾀어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의 책임을 하나님과 하와에게 전가합니다(창 3:12). 사람이 비열해지면 무슨 일이든지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법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고, 가장 쉬운 일은 남의 흉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의 흉을 보는 것은 참과 거짓을 잣대로 삼기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쉽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말하는 이야기에 마음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정신 나간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처 입은 자화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벌거벗겨진 자존심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벌거벗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로 와서 종처럼 사셨습니다. 나중에는 범죄자의 탈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우리의 자화상을 복구시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자화상, 상처받은 자화상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시고 우리 각자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브래드 피트 같은 멋진 배우가 냄새나는 노숙자와 함께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노숙자의 자존심은 회복될 것입니다. 노숙자 자신도 멋진 사람과 살기 위해서 점점 변화되어 갈 것이고, 결국에는 새로운 자화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결국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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