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대 (사사기 10:17~11:3)

  • 입력 2019.09.19 11:27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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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덕 목사(세인교회)

태풍 링링으로 인한 피해가 심했습니다. 그 와중에 교회 첨탑이 무너져 나간 피해가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일간 신문 기자가 잘려져 나간 교회 첨탑을 배경으로 기사를 올렸습니다. 인터넷 판에 고스란히 올라온 이 기사에 아니나 다를까 벌떼 같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중에 가장 제 마음을 아프게 한 댓글은 이 댓글이었습니다. “교회 십자가 첨탑이 무너진 것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누가 피해 배상을 하지? 하나님이 하면 되겠네. 그런데 어쩌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 댓글을 읽다가 사사기의 주제 구절인 마지막 구절, 사사기 21:25절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이 철저히 무시당하던 시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자기 멋대로 막 살던 랜덤의 시대였던 사사 시대가 불연 듯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을 난도질하는 시대, 하나님을 장기판의 졸(卒)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시대가 바로 지금 저와 독자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주인공은 9번째 사사인 입다의 무대 등장을 알리는 기사입니다. 길르앗의한 지역에서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입다 는 그의 아버지의 본처가 나은 형제들에 의해 길르앗에서 쫓겨나는 불우한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배 다른 형제들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입다는 돕에 거하면서 거기에 모여든 ‘잡류’ 즉 ‘깡패, 건달’들과 함께 악한 일을 도모하며 막 살았음을11:3절에 증언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번역 3절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그래서 입다는 형제들을 피해 돕이라고 하는 땅에 가서 살았는데 건달들이 그에게 붙어서함께 어울려 다녔다.” 여기까지 11:1~3절을 정리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잠시 돌아가겠습니다. 사사 야일이 죽자 가나안 입성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받아들이며 영적 간음의 소굴로 진입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다시 심판하기 위해 암몬을 사용하셨고, 18년간 그들의 압제에서 고통을 당하게 하셨음을 지난 호에서 살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회개를 하자 하나님이 마음에 근심을 하시며 흔들리셨다고 10:16절이 증언하고 있음도 살폈습니다.

그러나 세밀하게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이전처럼 당신께서 택한 사사를 다시 드셨다는 증언이 나오지 않고 길르앗의 입다 기사가 곧바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물리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길르앗의 형제들과 주민들이 거의 강제적으로 쫓아냈던 돕 땅에 거하면서 막 살고 있었던 입다를 찾아간 사건은 주목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들이 입다를 찾아간 이유는 암몬을 물리쳐 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사기 11:6절에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에게 약속한 것은 우리에게 와서 ‘장관’이 되어 암몬과의 싸움을 이끌어주면 우리가 순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장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찐’은 직역하면 ‘ruler’ 즉 ‘통치자’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여백을 통해 보고 있는 사사시대의 개념으로 적용한다면 ‘쇼페트’ 즉 ‘사사’가 되어 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필자는 바로 이점에서 충격으로 받습니다. 입다 사사 이전의 8명의 사사들 역시 그리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사로 부른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9번째 사사인 입다는 하나님이 부른 사사(쇼페트)가 아니라 사람이 찾아낸 지배자(ruler)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 이 점이 충격으로 다가옵니까? 이렇게 해석해도 될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하던 시대, 하나님 인정하기를 무척이나 싫어하던 시대, 하나님을 잊고 싶어 하는 시대, 하나님의 간섭을 못 견뎌 하던 시대가 바로 입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던 시대였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은 사사시대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사사 같지 않은 사사가 바로 입다였다는 사실입니다. 섬뜩한 것은 2019년 9월의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가나안에 입성한 초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보다 더 심각한 영적 랜덤의 시기를 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보아도 하나님의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기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지금의 삶을 살아내야 할까요? 오래전,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고 옥한흠 목사께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동역자들에게 이렇게 토설한 글을 읽다가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은혜 없이, 감격 없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일급사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전파하는 주체입니다.”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주군의 은혜를 날마다 공급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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