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봉우리마다 횃불을 밝힌 기도의 여인, 이형자 권사

  • 입력 2019.11.13 16:58
  • 기자명 지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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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지펴 따뜻한 밥을 짓는 심정으로 자서전 펴내

 

매란국죽(梅蘭菊竹) 문인묵화(文人墨畫)의 소재로 쓰여지는 사군자(四君子)의 의미를 투영해 △하나님의 정성에 물들다 △두 손으로 횃불을 들다 △십자가에서 흐르는 보혈을 따라가며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등으로 발자취를 기록한 자서전이 출간됐다.

 

재단법인 기독교선교횃불재단 이사장이며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매년 펼치고 있는 저자 이형자 권사가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담아 <평생기도>를 펴냈다.

 

한 여인의 인생 이야기를 그려낼 때 자칫 자화자찬 미화 일색으로 물들기 십상이건만, 그의 자서전에서 군더더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믿음의 가정에서 본이 되는 신앙을 보고 성장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은혜위에 은혜를 입고 자랐다.

 

거장 박노수 교수, 한국적 수묵화를 창조한 장우성 화백에게서 사사 받은 만큼 탁월한 수묵화의 소질을 지녔지만 계획했던 프랑스 유학의 꿈은 교통사고로 삶의 방향이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화여대 동양학과 4학년 졸업반 시절 맞선을 본 것이 지금까지 동반자로 함께 하는 최순영 장로다.

 

황해도에서 사업을 했던 시댁은 광복 후 월남해 동아제분을 창업했고, 1960년 말 대한생명보험을 인수해 신동아그룹의 기초를 닦게 된다. 한남동에 시아버지가 지어주신 집에서 세 사람이 모여 기도모임을 시작한 것이 ‘루디아횃불회’라는 가정 제단으로 확대돼 횃불운동의 뿌리가 됐다.

 

당시 이천석 목사, 조용기 목사, 김옥길 총장, 안이숙 사모 등 말씀을 전하면서 모이는 사람들이 2~300명씩 늘어나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식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던 그녀는 이천석 목사님의 조언에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큰 기도회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몇 백 명씩 모이다보니 기도회 장소를 따로 마련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차에 강력히 별도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맞물려 이대 동문들의 의견도 분분하게 나타났다. 결국 각자 마음에 비전대로 흩어져 기도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최순영 장로를 통해 집 아래 채소밭 200평에 지하 2층, 지상 3층 건물을 짓고 1979년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선교원’을 문화공보부에 비영리 법인으로 등록하며 한국횃불선교회관을 개관한다.

 

하나님께서 명확히 보여주신 비전은 ‘마른 가지마다 횃불에 불을 붙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따라 횃불회 모임에는 전국에서 사역자들이 모였고 예배 후 안수기도로 치유역사가 일어나는 등 영적 체험을 한 이들의 자발적인 횃불회가 가동됐다.

 

이후 횃불회 모임에 기꺼이 말씀을 인도했던 유명한 목회자들의 협력에 힘입어 매년 ‘전국 횃불 연합 대성회’를 열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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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 사역은 말씀과 기도, 성령이기에 전국 곳곳 마른 가지같은 심령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불길은 갈급한 이들에게 은혜의 단비를 맛보게 했다.

 

선친의 경영권을 승계 받아 30대 후반에 신동아그룹 회장이 된 최순영 장로는 매사 부인에게 기도 부탁을 즐겨했다. 집에서 모이는 기도 모임을 지지한 것을 보더라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대한생명은 우리나라 최초 생명보험주식회사로, 부도 위기에 놓였던 기업을 인수하여 2년 만에 정상 궤도에 올려 신동아그룹의 중심회사로 발전시켰다. 1985년에 완공된 여의도 63빌딩은 88올림픽을 개최한 우리나라 최초의 랜드마크로 상징성이 높이 평가됐다. 거기에 얽힌 설계, 건축, 감리 등 모든 과정은 가히 기적의 롤러코스터다.

 

집안 소유의 말죽거리공원 인근에 자리잡은 양재동 땅을 다시 매입하게 되는 경유를 거쳐 건축한 것이 1991년 완공된 지금의 ‘횃불선교센터’다. 건물을 바라보면 멀리서도 보이는 ‘선한 목자상’ 세라믹 타일 벽화가 먼저 눈에 띈다.

 

학창시절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동경인듯 횃불선교센터 내에 화랑을 만들어 영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발굴하고 돕겠다는 마음으로 ‘트리티니 갤러리’를 무료로 개관해 이를 통해 마음에 쉼을 얻곤 한다고 토로한다.

 

이형자 권사는 ‘횃불 사역’을, 최순영 장로는 ‘할렐루야 사역’을 중심으로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깊고 넓은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1998년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최 장로가 검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터졌다. 일사천리로 수사가 진행되어 외화 밀반출, 계열사 불법 대출 등의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그러던 중 문제의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마침 그 자리에 하용조 목사 부부가 있었다. 검찰총장 부인이었다. 자기의 고가 옷값을 대납해야 남편 구명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옷값 액수를 들은 이 권사는 정중하고도 간곡히 사양했다. 몇 달 후 이 사건은 나라를 흔드는 큰 사건으로 비화됐다.

 

긴 공방 끝에 2000년 11월 9일 서울지법 319호 법정에서 김대휘 부장 판사는 ‘로비는 없었다’로 무죄 판결을 했지만 모든 언론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진실은 ‘옷값 대납 거절’사건이지만 ‘옷 로비 의혹 사건’으로 각인되어 버렸다.

 

이어 1999년 8월 신동아그룹을 비롯한 22개 계열사는 해체되고 만다. 한 순간에 강제로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 부부는 망연자실에 빠졌다.

 

모든 것을 잃고 남겨진 그루터기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횃불과 할렐루야 사역은 계속됐다.

 

횃불선교센터와 함께 자리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는 1997년 인가를 받았다. 2016년 목회학 박사과정이 개설돼 미국 학위의 길도 열렸다. 또 기독교계 유엔총회로 일컫는 GCOWE ‘95를 거치며 전 세계의 복음 횃불이 번져 나가게 된다. 일본인 선교사 부인의 강력한 권유로 마련한 2007 WOGA(세계여성리더선교대회)을 통해 의기소침했던 마음에 복음의 횃불은 잠잠히 불타고 있었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 권사는 2008년, 무릎의 기도를 통해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된다. “네 민족을 사랑하고 네 동족을 아껴라”

 

사흘 째 똑같은 말씀을 듣고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향한 기도와 공부를 했다. 2년 여 준비 끝에 2011년 ‘횃불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의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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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 삶의 터전을 만드느라 희로애락에 지친 동족들이 막상 조국에 돌아와도 환영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한인 디아스포라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고난의 역사 뒤에 위로와 평안을 그들 가슴에 담아주었다.

 

담장을 넘은 <평생 기도>의 끝에는 이 권사의 담담한 고백이 흐른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야 은혜를 경험한다”고 말하는 이 권사는 “하루하루 버티며 나아갈 힘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살아왔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권사가 횃불 사역을 시작한 지 어언 40여 년이 넘고 있다. 앞으로 한인 디아스포라를 섬기는 사역, 횃불회 사역,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사역에 집중한다는 생각과 2022년 제10회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 선교대회를 잘 준비하는 것이 이 권사의 넝쿨같은 기도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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