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바른 신학 위에 서야 합니다(사사기 11:32~40)

  • 입력 2019.12.13 10:13
  • 기자명 컵뉴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덕 목사.jpg

이강덕 목사(세인교회)

저와 여러분은 지난 호에서 입다가 하나님께 무리한 서원을 드렸음을 나누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었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신 제물 서원이었습니다. 더 리얼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서원한 것입니다. 결국 입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한 셈이 된 것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승리하고 돌아갈 때 나를 처음으로 맞이해 주는 대상을 하나님께 번제의 제물로 드리겠다는 사악한 행위에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게 되어야 마땅합니까? 단호하게 ‘NO’이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본문32~33절을 보면 입다가 요구한 대로 암몬을 그의 손에 넘겨주심으로 반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입다로 하여금 아로엘에서부터 민낫 성읍에 이르기까지 20개 성읍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 일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자면 입다의 가증한 이방적인 행태를 하나님이 수용하신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입다가 서원한 잘못된 행위에 ‘YES’를 하신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저는 이 대목에서 대단히 세밀한 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금의환향한 입다를 제일 처음으로 반기며 나온 장본인을 본문 34절에서 사사기 기자는 그의 무남독려 외딸이라고 적시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입다의 요구를 수용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입다의 불신앙적인 행태를 준엄하게 경고하신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게 됩니다. 본문 35~36절을 원어성경을 그대로 잘 살려 번역한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입다는 자기의 딸을 보는 순간 옷을 찢으며 부르짖었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하필이면 왜 너란 말이냐! 주님께 서원한 것이어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냐!”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입다 에게 전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당시 만연했던 이방적인우상 숭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하고 있는 영적 무질서를 무섭게 경고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습니다. 입다의 이 왜곡된 불신앙에 맞서 일하신 하나님의 반응을 보며 저와 독자들이 함께 경성해야 하는 교훈에 접근해 보십시다.

●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 바른 신학적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이율배반’의 일을 행한 입다의 반신학적이고 반신앙 적인 행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심판하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입다의 사악한 행위를 그대로 좌시하지 않으시겠다는 마음으로. 저는 이번 호에서 독자들과 함께 조금의 양보 없이 지향하고 싶은 절절한 성찰이 있습니다. 적어도 나와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바른 신학으로 무장하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마가복음 10:42~4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주님이 제정하신 신앙의 강령은 ‘섬김과 종 됨’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타협하지 않고 달려가야 하는 신학적인 고집은 반드시 이 두 행위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교회도 마땅히 이 가치관을 갖고 달려갈 때 바른 신학 위에 서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청파 교회를 섬기는 김기석 목사가 최근 발간한 ‘욕망의 페르소나’에 다음과 같은 광야의 소리를 기록했습니다.“교회가 강자들의 호의에 의지하려 할 때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이 많아질 때 그 전략은 가속화되기 마련이다. (중략) 복음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교회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유력자가 없어서도 아니다. 예수 정신을 꼭 붙들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풍요로 지향하는 순간 예수 정신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이다. 십자가의 신학이 아닌 영광(기고자주-번영)관의 신학에 취할 때 복음의 능력은 사라진다.” (김기석, “욕망의 페르소나”, 예책, 2019년,pp,169-170.)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바른 신학의 설정 때문에. 그래서 시카고대학 교수였던 랭던 길키가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른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갈파도 적어도 기고자에게는 벼락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돌하는 궁극적인 전투지다. 인간의 교만이 이기면기독교는 인간 죄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투 속에서 인간 자아가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이익에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갖는 이기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랭던 길키, “산둥수용소”, 새물결플러스, 2013년,p,360.)이번 주간도 독자들에게 바른 신학의 은혜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