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욕

  • 입력 2019.12.13 11:32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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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국 목사 (한소망교회)  
[프로필]
▣ 협성대학교 신학과 졸업
▣ 감리교신학대학교 선교대학원 졸업
▣ 서울남연회 강동지방 감리사 역임
▣ 온맘 닷컴 “목회칼럼” 연재
▣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기독교 고전 중에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이라는 책이 있다.이 책은 3~4 세기 때 사막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던 기독교 교부 특히 동방교부들의 삶과 지혜와 같은 것들을 역은 묵상집이다. 이것을 초기 교회사에서는 귀중하게 여기며 어느 학자는 기독교의 원천이라고 평을 한다. 그 가운데 몇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명예가 얼마나 헛것임을 아는 지혜들이다. 어떤 수도사가 아바 모티우스에게 물었다. “만약 제가 다른 곳에 가서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특별한일로 유명해 지려고 하지 말게. 예를 들어 ‘나는 성찬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혹은 ‘나는 애찬을 들지 않는다’ 하는 등의 말을 하지 말게나. 이런 일들은 자네로 헛된 유명세를 타게 해 준다네. 그런 유명세는 처음에는 좋은 듯하지만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지. 사람들은 그런 실천들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몰려가게 되어 있어”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아바 모티우스는 다시 대답해 주었다. “그대가 어디에서 살든지 다른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이 사는 방식으로 살게. 그러면 평화를 얻을 테니까. 자신을 남들과 똑같이 여기는 것이 바로 겸손이야.

 

그대가 한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그대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여길 것이고 어느 누구도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네”(모티우스 1)포이메노스가 “만약 수도사가 두 가지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자 한 수도사가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포이메노스는 “육체의 편안함과 헛된 영광이지”라고 대답해 주었다.(포이메노스 66)노출되어 있는 보물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듯이 알려진 덕목도 마찬가지로 사라진다. 불 곁에 초를 두면 녹듯이 영혼도 칭찬에 의해 훼손되고 애쓴 모든 노력의 결과를 잃어버리게 된다.(신클레티카 21)어느 유명한 수도사에게 어느 날 로마의 황제가 방문하였다. 황제가 사막에까지 온 것이다. 수도사와 만난 황제는 여러 궁금했던 영적인 문제들을 상담하면서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아는가를 물었다. 수도사는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자신이 황제임을 밝혔다. 당황한 수도사는 황제에게 예의를 표하고 계속 대화를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그 수도사는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명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것 중에 하나가 명예라고 한다. 명예는 누구나 누리려고 한다. 권세욕도 대단하겠지만 남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는 명예, 우러러 보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에 눈을 조금만 돌린다면 명예에 대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명예와상은 가급적 누리지 말라는 것이다. 왜인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상급과 인기와 칭찬은 상대적으로 천국,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리고 받을 상급과 칭찬을 반감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내려오는 동안 이렇게 살아갔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예수를 따르려고 했던 사람들이고 성경을 될 수 있으면 원초적으로 이해하고 믿으려고 했던 사람, 성경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해 보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수도원의 아버지 안토니, 웨슬리의 영성형성에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이집트인 마카리우스, 우리나라에는 이세종, 이현필, 엄두섭 등이 있다.

 

목회를 하는 나에게도 항상 일어나는 것은 욕망이다. 명예에 대한 욕망이다. 마치자라가 고개를 내밀 듯이 고개를 든다. 화려함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많은 사람에게 인기와 존경과 칭찬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될 수 만 있으면 초연해야 한다. 아니 외면해야 한다. 버려야 한다. 마치 바울에게 있어서 삼층 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인기와 모든 사람들에게 집중이 될 만한 신비적 요소, 간증의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드러내지 않은 겸양과 영성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 초대교회 사막의 영적 스승들의 영성은 드러내지 않는 영성이었다. 오늘 신앙을 하는 우리들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영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성서적인 말씀과도 역시 거리가 먼 것은 아닌가?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나타내려고 하고 세상에서 영예와 칭찬을 들으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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