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알라(요한복음 8:31~32)

  • 입력 2020.04.02 17:15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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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목사(서울중앙교회)

 

 

 

 

 

 

솔로몬의 처소에 어느 날 창녀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별것 아닌 것처럼 읽어가지만 창녀 둘이 왕 앞에까지 갈 수 있다는 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솔로몬이 천 번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구한 것이 있습니다. “이 백성들을 제대로 치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그들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누구에게는 창녀였지만 누구에게는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겁니다. 그냥 물리칠 수도, 발로 차버릴 수도, 곤란하다고 피할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자녀였다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무엇에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겁니까? 아픈 사람의 소원은 병에서 자유하는 것이고, 빚지고 사는 사람은 그 빚에서부터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각기 나름대로 이런 저런 문제들이 해결되고 더 좋은 것 얻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때로는 분노와 미움에서, 때로는 이 사회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자유롭기를 구하는 사람들의 그 모든 소원을 주님은 한 마디로 뭐라고 표현하십니까?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하겠다.”그렇습니다. 죄가 만든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그 모든 절망과 좌절과 불공평함, 어둠의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에든지 노예가 될 수밖에 없어서 더하고 더하며 살다 그것의 종이 돼가는 것도 모르고 욕심내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자유를 주는 것은 진리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유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모세는 돌로 쳐서 죽이라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나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단지 살인과 도적질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네게 주신 형제를, 너와 함께 두신 모든 이들을 사랑하라.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시는 이는 그가 누구이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를 살리리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돌로 쳐라.” 주님에게서 비추는 그 진리의 빛이 사람들의 어둠을 들춰냈습니다. 참 자유를 얻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성도는 말씀으로 삽니다. 단지 말씀을 알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에 거하고 말씀이 즐거워서 주야로 묵상하며 삽니다.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바울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설득력 있는 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어야 한다.”그렇습니다. 믿음직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믿게 하기 때문에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있고, 많은 것이 생겨나도 여전히 그 모든 근원의 핵심에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빛이시면 다른 것은 빛이 아니고, 주님이 길이시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님이 진리라고하면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고, 주님이 내가 떡이라 하면 정녕 우리를 먹일 수 있는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구하면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모두 진리의 자유를 경험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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