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윗대

  • 입력 2020.04.09 11:46
  • 기자명 컵뉴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동훈 목사.jpg

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화성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한쪽 벽에 걸린 표어다. 1919년 4월 15일, 15세 이상의 주민 29명을 교회당에 가두고 불을 지른 일본군의 만행, 이른바 제암리학살사건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일본이 뒤늦게 사과는 하였으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중국에도 난징(남경)대학살사건이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때, 5만 명의 일본군이 2월간에 걸쳐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 강간 등으로 양민 30만 명을 죽였다. 그 기념관에 ‘前事不忘 後事之師’(전사불망 후사지사-옛일을 잊지 않아야 후일의 스승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 입구에도 ‘Forgive but don’t forget!’(용서하되 잊지 마라!)라는 팻말이 있다. 1943년부터 2년간 독일군이 아우슈비츠 등에서 1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조부는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도륙되는 동학농민군을 목도하였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등으로 국권피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의 온갖 수탈과 박해를 고스란히 겪었다.

 

1945년 극적으로 해방을 맞지만 극심한 가뭄으로 심각한 굶주림을 피할 수 없었고, 1950년 일어난 6·25전쟁으로 애달프고 고단한 인생길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때 아들 여섯을 손수 땅에 묻어야 했으며, 50세가 넘어서 낳은 늦둥이 하나만 겨우 살릴 수 있었다.

증조부는 19세기 중반에 4촌 동생과 함께 고조부가 살던 고향을 떠나 영양으로 이주하였다. 마을은 금세 임씨 골목을 이루었다. 증조부와 아들 3형제, 그 4촌과 자손들이 마을을 일구고 살다가 거기서 모두 뼈를 묻었다. 하지만 그 아랫대는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백조부는 아들과 함께 식민지 시대에 일찍 죽었으며, 그 손자도 전쟁 직후에 죽어 유복자를 남겼던바, 백조부의 며느리와 손자며느리는, 마치 나오미와 룻처럼 마라의 쓴물을 마시며 고조부가 살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증조부도 일제 치하에 죽어 그 외동딸은 내 조부의 손에서 자라나 청송으로 출가하였으며, 조부의 외아들인 내 아버지만 마을을 지키다가 끝내 떠남으로써 윗대의 선영만 그곳에 남게 되었다.

 

증조부 4촌도 손자만 하나 남기고 아들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죽었던바, 그 손자는 일치감치 마을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의 손을 잡고 먼 산길을 걸어 그의 집을 찾은 적이 있다. 산간오지 산비탈 외딴집에서 아이 일곱과 아홉 식구가 살고 있었다. 거적때기 문으로 기어들어가는 토담집이었다. 그가 우리 집을 찾을 때까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지 몰랐다. 그 살림살이는 정말 구차하였으며, 내 조모는 늘 그의 생계를 걱정하였다. 결국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아들 가운데 둘째가 나와 동갑내기로 지금 양주에 살고 있다. 그 윗대가 독자로 쭉 이어져 내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2020년은 경술국치 110년째다.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 사형장 입구에 아직도 큰 미루나무가 서 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애국지사의 통한사를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통곡의 나무’라 부른다.

 

용서의 문자적 의미는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벗어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용서하고 잊으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경험을 버리는 것이라 하였고, 토마스 사즈(Thomas Szasz)는 용서하지 않고 잊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지만, 용서는 하되 잊지 않는 사람은 지혜롭다고 하였다. 불망국치(不忘国耻)! 우리는 일본군의 만행을 절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못 박은 로마군을 위해 기도하신 모습에서, 용서의 진정한 의미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은 용서에서 출발하고 용서는 사랑으로 결실한다.‘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누가복음 17:3)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