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로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사람(2)

  • 입력 2020.05.07 14:44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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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민 목사 (소망전원교회)

덧니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덧니 때문이 아닙니다. 덧니를 이길 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덧니는 실패한 인생에겐 최고의 핑계거리가 되고, 성공한 인생에겐 영광의 흔적이 됩니다. 성도의 믿음은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편견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성도는 가장 크고 높은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문제나 갈등도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로 오르기 위한 계단이 됩니다. 큰 생각은 작은 문제를 쉽게 넘어갑니다. 작은 생각으로는 작은 문제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품게 되면 사람이 당하는 모든 시련과 아픔을 잘 넘어갈수 있게 됩니다. 성도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넘어서지 못하는 문제도 성도는 간단히 넘어설 수 있습니다. “눈 밝은 사람은 장님과 같고, 귀 밝은 사람은 귀머거리와 비슷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다르지 않고,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과 비슷하다.

목적을 이루고 나면 누구나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한다.” 장로게경(長老偈經)에 있는 말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문제는 보는 방향과 인식하는 차원에 따라 아무 것도 아니기도 하고 중대한 것이기도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끝나게 되니 호들갑떨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세상살이를 초월해야 한다는 인식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살아있는 동안 당하는 문제들을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사람과 죽으면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삶을 초월할 수 있을까요? 만일 성도가 불자보다 삶에 더 연연한다면 그것은 아직 영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조건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귀가 밝아도 말 안 듣는 사람은 귀가 어둡지만 말 잘 듣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잘 보이는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보다 못한 것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이 못된 짓을 하면 힘없는 사람의 착한 짓보다 못한 것이 됩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 만큼 잘 살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잘난 사람이 못 사는 것은 죄악입니다. 잘난 것은 그만큼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잘난 척만 하는 것은 못난 사람이 못난 짓을 하는 것보다 못한 짓입니다. 못난 사람도 잘 살려고 애쓰고 있는데 잘난 사람이 막 살면 그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못난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는 힘겨운 인생을 살아낸 것만으로도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잘난 사람들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잘나게 하신 이유는 잘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운 이를 가지고도 서로 욕하고 비난하며 살지만 성도는 덧니로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가지런한 이를 가진 사람이 험한 말을 하는 것은 이(齒) 값도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덧니를 가지고도 아름다운 말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린도후서 12:9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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