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만이라도(창세기 7:13~24)

  • 입력 2020.05.28 14:35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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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목사(서울중앙교회)

우리는 왜 믿음을 확실하게 알고 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천국을 한 번이라도 보여준다면 잠깐이라도 그 창조의 순간에 우리를 세워 주신다면 환상 중에라도 우리를 데려가셔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망치를 두들기게 하고 홍수에 떠오 르는 배의 뱃전을 보게 하신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확실하게 충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확실하고 분명하다면 우리의 믿음은 굉장히 수학적인 믿음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한다.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황당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고 그렇게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길로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자리는 확실하고 분명한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분, 그 사이에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택하시고 홍수를 준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시에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힘과 지혜를 가지고 온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자신들만의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노아는 당대의 의인, 완전한 자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들의 법과 기술을 의지하는데 노아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셔서 하늘 위의 물과 땅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궁창의 물을 받치고 계셨기 때문에 땅에서 숨 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찾지도 않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받치고 있던 궁창의 물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창 세기의 홍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노아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부요 하고 권력을 가졌어도 ‘태어나고 죽었다!’ 이 두 개로 표현되는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모두 잊혀져가고 떠나가도 여전히 하나님은 위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노아를 통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홍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셨는지 그 처참함을 노아는 정작 알지 못합니다. 그 많은 궁창의 물이 다 쏟아져도 배에 역청 한 번 칠하고 걱정도 안 합니다. 노아는 그저 나를 타라고 하신 것은 내릴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안에서 평안과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을 보고 성경의 무수한 사람들을 봅니다. 누가 진정한 승리자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승리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얻고 성을 세우고 그의 후손들은 대단한 문명을 이루는 역사의 시조가 됩니다. 반대로 아벨은 어떻습니까? 이름부터가 ‘덧없다. 쓸모없다’ 그런 뜻입니다. 부모에게조차 그런 이름으로 지어진 그를 누가 인정하고 받아줬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아벨은 믿음으로써 지금도 증거 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인생처럼 가족도 받아주지 않는 마치 무의미한 존재로 그런 취급받으며 살아왔는데 아벨이 드린 단 한 번의 예배는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모든 세상을 얻고 이겼다는 가인과 무의미한 존재로 취급받았지만 지금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아벨, 누가 진정한 승리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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