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평강교회 박희정 목사 “‘그 사랑’ 불려지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지길”

  • 입력 2020.12.03 15:46
  • 기자명 임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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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으로 깨어있는 교회…평강키즈들 길러내 다음세대 전문 예배자로 세워

가정이 무너지던 그때, 교회에서 음악을 만났다

찬양인도자로 밟은 세계 각국에서 예배학교로 부흥 도와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아버지 은혜 내가 노래해. 그 사랑 변함없으신 거짓 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 그 사랑 날 위해 죽으신 날 위해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그 사랑.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하늘의 어떤 권세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그 사랑 예수.”

교회 좀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노래 ‘그 사랑’. 마커스 등 여러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불리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찬양에 언제나 손꼽히는 곡이지만 작곡가 박희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목회자로서 한 교회를 27년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는 이들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다. 심지어 박희정 목사를 알고 지내던 사람조차 작곡가 박희정과 동일인물이라곤 생각조차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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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밝히는 ‘그 사랑’ 작곡 이야기

박 목사는 찬양인도자로 활동하면서 ‘내가 아는 복음이 하나의 노래에 담겨, 듣는 이마다 복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이라는 소망을 가졌다. 그 소망은 하나님이 주신 음악적 달란트로 인해 절묘하게 구체화됐다. 트랜스포메이션 워십팀으로 섬기던 2004년에 처음 발매한 앨범에 ‘그 사랑’과 또다른 히트곡 ‘주님의 임재 앞에서’를 담았다. 당시만 해도 이 곡이 이처럼 사랑받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박 목사는 “세상에 찬양곡은 너무 많지만 특별한 찬양을 만들고 싶었다. 노래가 불려지는 것만으로 복음이 알려지는 곡을 만들고 싶었다”며 “내가 아는 복음이 가사가 되어 멜로디에 정확히 들어맞는 희열과 감동은 작곡가만이 안다. ‘그 사랑’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곡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박 목사는 “‘그 사랑’을 발표했을 때 아내가 꿈을 꿨다. 미국 CNN방송에서 미국 전역에서 불려지고 있는 노래라면서 한국의 박희정이라는 목사가 쓴 곡이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당시엔 ‘한국 찬양을 미국에서 부를 일이 있나’라고 생각하고 웃어 넘겼지만, 놀랍게도 ‘그 사랑’은 지금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고 있다”고 감사를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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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음악적 재능 “음악이 제일 쉬웠어요”

박 목사의 음악적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르신들이 모이면 조용필 노래를 멋지게 불러제끼는 동네 가수였고, 합창단에서는 솔리스트 역할을 맡았다. 부유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문서를 사기당하면서 순식간에 반지하 단칸방 신세로 전락했다.

“의기소침해 있는 나에게 동네 친구들이 ‘여자친구 소개시켜준다’고 교회에 가자고 했다. 반주하는 친구가 너무 예뻤고, 피아노 치고 기타 연주하며 노래하는게 너무 좋았다. 그렇게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워낙 음악을 좋아했던 박 목사는 중학교 시절부터 성가대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성가대를 하다보니 악보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중학교때 모든 악보 보는 방법을 익혔다”며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내겐 쉽고 재밌었다. 웬만한 악기는 다 연주할 수 있다”고 했다.

소위 ‘교회에 미친 놈’으로 교회 안에서 자라나 전도사로 섬기던 그는 음악으로 학위를 받아서 뮤지션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M.Div 과정을 밟아 목회를 해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하나님은 박 목사를 목회로 이끄셨고, 목회자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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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부르심에 응답해 1년만 섬긴다는 예배사역이 10년째

음악과 찬양의 은사를 받은 박 목사는 인천평강교회에서 부목사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각별히 선교에 비중을 두고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5년 전부터 태국 치앙마이에서 시작한 예배학교는 5개 도시로 확장되어 4차까지 진행됐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특히 인도차이나 5개국(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예배학교 선교센터를 건립하여 목회자들에게 예배와 복음을 가르치고 예배리더들을 훈련하여 예배 부흥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계획이다.

특히 박 목사는 고구마전도왕 김기동 목사와 함께 매년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Refresh Conference’(재충전 수련회)로 섬기고 있다.

박 목사는 컨퍼런스에 함께하게 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Refresh Conference’ 사역으로 이끄시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느끼고 결단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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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으로 유명한 심삼종 교수가 고등학교 친구다. 기존 컨퍼런스의 예배팀이 깨지게 되어 김기동 목사가 심삼종 교수를 찾아왔고, 심 교수는 선교를 향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당시 부목사로 있던 나에겐 항공료조차 감당하기 벅찬 사역이었으나 교회에서 절반은 지원해준다는 약속에 힘입어 1년만 섬겨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 1년은 벌써 10년이 됐다. 첫 예배사역은 2012년 터키 이스탄불이었다. 첫날 공연은 뜨거웠다. 선교사 자녀들로 구성된 중보기도팀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님의 임재 앞에서’의 작곡가가 왔다는 사실에 기뻐 뛰었다. 중보기도팀 주제곡을 써달라는 요청도 흔쾌히 허락했다. 너무 기분이 좋은 아이들은 호텔 건너편 해변가에서 철야기도를 하자며 고속도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였다. 음주운전 차량이 중보기도팀 리더를 충격했고, 그렇게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결코 있어서는 안될,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다. 너무 큰 충격에 세계 각국에서 모인 100여명의 스탭들은 집회를 중단할 각오로 밤을 지새고 있었다. 그때 사망한 아이의 부모가 스탭들을 찾아와 한 말은 “집회를 중단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음주운전을 한 무슬림 20대 청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왔다는 그들의 모습은 엄청난 감동으로 퍼져나갔고, 그날 그 자리에 성령의 불을 떨어뜨렸다.

박 목사는 “콘티에 의하면 모두 함께 춤추는 찬양이었지만, 아무도 올라오지 말라고 하고선 수백명 앞에서 기타 하나로 찬양을 인도했다. 그날 우리는 하늘문이 열리고 기름을 부으시는 역대급 감동의 예배를 드렸다. 그 아이의 순교의 피가 내 가슴에 뿌려졌다”면서 “그때 ‘주님이 이 사역으로 나를 부르셨구나’라는 강력한 콜링을 느끼고 결단했다. 그렇게 여러 대륙과 많은 나라들을 다니며 사역을 이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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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이나 사임했던 인천평강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겨

인천평강교회와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찬양전도사로 시작해서 교육파트를 맡았고, 27년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매번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때론 굽이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했지만 결국은 주님이 부르신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서는 안 된다’며 세 번이나 사임하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번번이 돌아와 인천평강교회 2대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천평강교회를 향한 박 목사의 애정은 각별하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평강교회와 함께한 박 목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공동체로 묶여있다. 그동안 중직자 양육과 수업을 박 목사가 모두 책임져 왔고, 성도들의 마음 속엔 ‘인천평강교회 제2대 담임목사는 당연히 박희정 목사’라고 내정되다시피 했다. 인천평강교회를 떠나 미국으로, 또 브라질로, 선교단체와 함께 공동체 목회를 하기도 했고, 오륜교회 예배담당 목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고생이라면 고생이었고, 방황이라면 방황이었던 시간들은 박 목사에게 오히려 약이 됐고 영적 풍성함을 가져다줬다. 찬양사역자이기 이전에 성도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받아 먹이는 목양자로 먼저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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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없는 목회자이지만 찬양사역의 달란트에 힘입어 인천평강교회는 항상 찬양으로 깨어있는 교회로 살아 숨쉬고 있다. 목회에 있어서도 박희정 목사의 음악적 재능은 빛을 발하며 평강교회를 차별화된 교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박 목사는 “예배학교를 통해 훈련된 교인들은 옛날 찬양과 요즘 찬양을 나누지 않는다. 우리교회 예배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분들도 두 손 들고 찬양한다. 자연스럽게 모든 세대가 하나된 찬양으로 예배드린다”고 했다.

이어 “나는 ‘어떻게 하면 전 세대가 함께 예배할 수 있을까’ 일찍부터 고민했다”며 “예배사역 30년 동안 고민하며 파격적인 편곡들을 해오다보니 옛날 찬송가를 요즘 아이들이 사랑하고, 기성세대가 요즘 노래로 함께 찬양하는 예배가 됐다”고 말했다.

또한 박 목사는 “우리 교회는 목회자가 비전을 선포하면 적극적으로 동참해주는 교회”라고 자랑했다. 올해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해외 선교 일정들이 줄줄이 취소되자 박 목사는 “어차피 몽골을 위해 사용했을 재정이라면 헌금으로 돕자”고 했고,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예상보다 두 배가 넘는 헌금이 모아졌다”면서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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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평강교회는 인천시 계양구 작전동 일대에서 새로운 성탄절 문화를 시작한 교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매년 성탄절이면 화려한 전야제 이후 정작 12월25일에는 썰렁한 분위기가 못마땅했던 박 목사는 12년 전부터 온 성도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분장을 하고 가장행렬을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이웃 교회에서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와 커다란 감동이었다고. 500여명의 성도들이 저마다 성탄절 분장을 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물을 나누는 행사는 이미 작전동 일대에서는 하나의 풍물이 됐다. 안타깝게도 올해에는 코로나 방역지침에 의해 성탄절 가장행렬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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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진짜 사역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박희정 목사는 그동안 ‘그 사랑’과 ‘주님의 임재 앞에서’ 등 노래가 세워지고 자신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예배인도자로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도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유명세를 얻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박 목사는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강권적으로 사역하게 하셨다. 나는 목회자가 되기에는 심히 부족한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면 생명 걸고 순종하겠노라 약속했다. 대신 늦어도 좋다고, 50세부터라도 날 써주시면 감사하겠다”고 기도했다고.

박희정 목사는 2021년이 만으로 딱 50세다. 신기하게도 약속이나 한 듯 요즘 들어 언론과 방송에서 박희정 목사를 주목하기 시작하고 있다. 인터뷰와 녹화 스케줄이 잡히고 있고, 조만간 3집 앨범이 한국과 베트남과 태국에서 3개 국어로 동시 발매를 앞두고 있다. 이 외에도 아직은 공개되지 않은 교회의 새로운 변화도 예고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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