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율 장로 신간 ‘회복의 능력’에 희망과 비전, 열정과 헌신의 기록 담아내

  • 입력 2021.03.18 14:57
  • 기자명 임경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00.jpg

 

회복의 여정에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회고담 형태로 정리

차마 밝히지 못했던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이야기까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달라진 생애가 나도 놀랍다”

전도받은지 25년 만에 처음 교회에 나갔다는 이승율 장로. 불교철학에 심취했던 사람이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운행과 섭리가 있었다. 이 장로 스스로 ‘삼동지간(三同之間)의 인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듯 인생의 동반자, 사업의 동업자, 미션의 동역자인 사모 박재숙 권사를 만나 아내가 심은 믿음의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기적들은 그의 인생을 드라마처럼 이끌어왔고, 동북아를 넘어 중앙아시아를 잇는 일꾼으로 쓰임받고 있다. ㈜반도이앤씨 회장이자 (사)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이면서 한국기독실업인회(CBMC)와 (사)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가고 있다. 이 장로가 최근 그의 인생의 여정을 담은 에세이 <회복의 능력>을 내놓았다. 그가 말하는 희망과 비전, 열정과 헌신에 귀기울여보자.<편집자주>

신간 <회복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해주십시오.

-회복의 여정에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줄여서 ‘회복의 능력’이라고 했다. 나의 생애에 임하신 하나님의 회복의 능력을 간증 또는 회고담 형태로 정리했다.

0.JPG

장로님은 그 누구 못지않게 기막힌 삶을 살아오신 것으로 보입니다.

-책을 읽어보거나 저를 아는 분들은 이승율 장로의 인생이 너무 드라마틱하다고 표현한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들어가기 전인데, 그때 교회 다니겠다고 약속하고 10년 만에 결혼하여 또 15년 만에 교회에 나갔다. 얼마나 질기고 못난 사람인지 전도받고 25년 만에 교회를 나간 셈이다. 1990년에 아이들 손에 이끌려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신년축복성회에 갔다가 거기서 완전히 깨지고 뒤집어졌다. 정말 예수님 이전과 이후의 생애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고 생각이나 진로, 사회활동 관계가 너무 달라져서 나 자신도 놀라울 정도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그렇게 됐다고 믿는다.

책의 부제가 ‘날마다 속사람으로 호흡하며 살아가기’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겉치레나 형식적으로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형태가 있다. 겉으로 부딪쳐오는 여러 상황들 때문에 갈등에 휩싸일 때도 많고 왜곡될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든지 사회적인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는 늘 겉과 속이 이중구조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새로운 마음으로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판단하고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항상 명심하고 늘 묵상하고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삶에 적용해 낼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속사람으로 호흡한다고 표현했다.

000.JPG

불교대학 철학과를 나와 기독교인이 되셨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난 이후에 젊은 날 10년 가까운 방황의 과정을 지나며 스스로 자학하듯이 가진 고통의 시간들이 많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다시 대학에 들어갈 당시에는 부모님과도 멀어진 고독하고 힘든 상황이었다. 동국역경원 탄허 스님의 세계관에 감화되어 있던 그때 내가 택할 수 있었던 길은 불교철학을 선택해서 대학에서 교수나 강사로 남는 길 외에는 다른 어떤 의욕도 대안도 없었다. 그런데 불교는 질문은 있는데 답이 없더라. 아무리 학문적으로 공부한다고 해도 공허한 심경을 벗어날 수가 없던 차에 아내와 함께 조경사업을 창업하면서 세속적으로 살았다. 

나는 매년 겨울이면 아이들과 스키장에 가서 며칠 놀다 오곤 했다. 1989년 말에 아이들 셋이 내 방에 들어오더니 ‘올해는 어디 가시려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스키장 가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큰아이가 올해는 기도원에 가자고 해서 오산리에 가게 됐다. 그게 시작이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깨지고 뒤집어졌다고 하셨다.

-오산리 기도원에 가면 여러 성전 중에 실로암성전이라고 있다. ‘혹시 암자 이름 아니냐’고 농담하던 중에 누군가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보게 된 소경 이야기를 해줬다. 그때 환상처럼 장면들이 떠올랐다. 언덕 위에 계신 예수님이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시니, 보이지 않는 중에 비탈길을 기어내려가 실로암을 찾아가면서 부딪힌 고통, 얼굴과 몸이 찢어지고 피흘리는 고통이 그려지면서 젊은 날 나의 방황이 연상됐다. 

그때 남들은 어떻게 했을지 모르지만나 같으면 눈을 뜨고 난 뒤에 너무 감동하여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면서 비탈길을 울며불며 달려갔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그 순간에 내 깊은 뱃속에서 용암처럼 울음이 터져나왔다. 평생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목숨까지 팔아서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나섰던 파우스트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벽공으로’라는 외침처럼 저 밑바닥에 있던 내가 끌어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나의 철학적인 터닝포인트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는 불가사의할 정도의 감동이었다. 그때의 감동과 생각은 이후 나의 30년 이상의 기독 인생을 끌어오는 가장 강력한 디바인 파워였다.

0000.JPG

이전에는 차마 밝힐 수 없었던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이야기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내의 전공을 살려서 반도조경공사(현재의 ㈜반도이앤씨)를 창업했는데 시작한 지 얼마 안 있어 우리 부부가 교통사고가 났다. 당시에 집을 지어서 담보대출을 받아 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사고가 나는 바람에 다 틀어졌다. 그동안 부채가 쌓이고 사채도 쓰다보니 결국 집을 청산하고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살았다. 역삼동 연립주택 단지 사이에 300평 공터가 있었다. 그 땅을 빌려서 앞쪽에는 상록수를 심고 샛길을 만들었고 뒷마당에 10평 정도 비닐하우스를 치고 아궁이도 만들어 1년 반을 살았다.

그해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 봄, 어린이날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유원지에 갔을 때 일이다. 애들은 놀고 나는 강가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에서처럼 흘러가는 강물에 반사되는 햇빛을 보며 고생했던 나날들이 떠올랐고, ‘이제는 이런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소주병을 깨서 팔을 찔렀는데 차마 긋지는 못하고 있던 중에 막내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얼른 넘어져 있는 아이에게 달려가 흙을 털어주고 달래주면서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나’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택시를 타고 비닐하우스에 도착했는데 첫째와 둘째가 더 놀다 오겠다고 하더니 한 10분 지나니까 바로 옆 담장을 넘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 모습을 들킨 큰애가 눈물을 흘리면서 ‘저 길(비닐하우스 진입로 샛길)로는 못들어오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갈 때도 그랬고, 학교 마치고도 늘 담장을 타넘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걸 알고는 그날 밤에 아내와 아이들을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밝히기 어려웠던 이야기지만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의 나를 이루고 있음을 고백한다.

00000.JPG

비닐하우스로부터 세 가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셨습니다.

-담장 사건이 있던 해에 가을쯤 되니 생활이 점차 안정되고 있었는데, 우리 비닐하우스에 전기와 수도를 연결해줬던 연립주택 주인이 갑자기 집을 판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리 직장에 떨어져 있던 나는 아내에게 ‘무조건 사라’고 했고, 비닐하우스에서 탈출해 그해 크리스마스는 연립주택에서 보내게 됐다.

두 번째 기적은 현대건설이었다. 우리 조경회사로 전화가 와서 커다란 가정주택인데 정원 보수하는 일도 하느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일을 가릴 사정이 아니라 무조건 한다고 하며 찾아간 곳이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의 논현동 주택이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소개받은 일이 성북동 현대건설 영빈관 정원공사였다. 당시 정주영 회장님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출장을 다녀와서 훌륭한 품평을 하시는 바람에 이후 현대건설 조경일은 모두 우리 회사가 맡게 됐다.

세 번째는 현대건설을 넘어선 기억이다. 부산대청봉 산꼭대기 충혼탑 건립을 현대건설이 수주했는데, 공사가 어렵고 적자가 날 것 같으니 맡아서 하려는 업체가 없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영남지사를 찾아가서 도급금액 90%만 받을테니 공사 자재만 대주고 시공방법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맡았다. 공사기간 1년 동안 너무 힘들었지만 결국 해내면서 내가 현대라는 큰 산을 넘었다는 자부심과 용기를 갖게 됐다. 누군가가 나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섭리를 비로소 느꼈다.

000000.JPG

이러한 기적의 씨앗을 심은 사람이 사모님이시라고요.

-나중에 깨달은거지만 비닐하우스에서 살 때 생활이 좀 안정되니까 아내가 그동안 교회에 헌금을 못했다며 헌금을 해도 되느냐고 하더라. 그때가 추수감사절 때였다.나는 교회에 안다녔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가는 것은 안막았으니까 그렇게하라고 했다. 내가 고생시키니까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다 들어주려는 마음이 있었다. 다음날 아내가 500만원을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멍해지더라. 1983년에 500만원은 우리의 전재산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미 헌금을 했다는데 어떡하나. 아내를 끌어안으면서 잘했다고 다독였다. 가진 것 없던 시절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헌금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내의 믿음과 마음을 보신 것 같다. 그 후갑자기 완전히 판이 바뀌듯이 새로운 기회들을 가졌던 것이 비닐하우스에서 아내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연변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의 경력이 특별하십니다.

-오산리 기도원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1990년도가 북경아시안게임이 있던 해인데, 한중수교가 이뤄진다고 하니 중국 골프장 사업에 진출하려고 중국 현지를 발로 뛰며 답사하던 때였다. 당시 농민들 토지보상 문제에 어려움이 있어서 중국 국가주석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에게 로비하려고 찾아간 자리에서 한 분의 크리스천 지도자를 만났다. 그분이 연변과학기술대학 설립총장인 김진경 박사님이다. 이 사람 하는 말이 자기는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 교민인데,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 중국 연길에 작은 전문대학을 세워서 조선족 사회도 돕고 중국 과학기술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도와달라는 거였다. 곁에서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2주 후에 서울 후원회 사무실에서 다시만나 시작한 협력이 만 30년이 됐다. 연변과학기술대학 설립뿐만 아니라 2001년에 남북합작 교육특구로 시작한 평양과학기술대학(개교 2009년 9월) 설립 및 운영에 같이 참여해서 건축위원장과 운영위원장까지 파노라믹한 과정을 거쳤다. 30년 동안 김진경 박사님과의 동역자로서 가졌던 경험, 신앙인으로서 갖는 보람과 기쁨은 인생 후반전을 이끌어가는 가장 아름답고 파워풀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였다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0000000.JPG

앞으로의 인생에 기대와 바람이 있다면?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지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프로방스의 헐벗은 산에서 양을 치면서 도토리나무를 되는대로 여기저기 심었더니 수십 년이 지나 숲을 이루게 된다. 나도 양치기 노인과 같이 북한의 헐벗은 산에 가서 나무도 심고 숲을 이루는 꿈같은 일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마음 속에서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북한의 다음세대 청년들을 기르고 국제화시대의 일꾼들로 길러내어 남북한 시대 협력과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의 최고의 보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 하나님의 깊고 크신 사랑의 능력이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딛고 회복하게 하는 능력이 되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도 회복의 여정에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 사랑의 능력이 우리를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그 사랑에 거하는 것이 내 삶의 보람이고 기쁨이다. 그런 마음으로 남은 생애도 살아가고 싶다.

00000000.JPG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