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훈 칼럼] 55. 아데모네오

  • 입력 2022.11.18 15:38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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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그리스어 아데모네오(Αδημονέω)는 ‘심히 근심하다’ 또는 ‘몹시 괴로워하다’의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깊은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찬 상태를 표명한 말이다.(마태 26:38, 마가 14:34) 2004년 9월 26일 주일, 9시 예배를 드리고 이른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을 만나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차량 정체로 1시 반쯤 서울 우이동에 도착하였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전화하였다. 한참 후에 딸만 나오고 아들은 나오지 않았다. 몇 차례 통화를 더 하였으나 끝내 시골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순간 몹쓸 자아(Ego)가 못된 본능(Id)을 일깨워 고약한 고통의 굴레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래, 맞아! 내가 아무리 애비 노릇을 못 해도 그렇지, 명절을 맞아 방구석에 처박혀 코빼기도 내보이지 않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부추기는 보복성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잠재의식에 깔린 욕지거리를 모조리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를 봤나? 야, 이놈아! 너는 애비도 없고 조상도 없냐? 배은망덕한 새끼 같으니! 이놈이 생각할수록 정말 싸가지 없네.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혀라도 깨물고 뒤져버려라.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애들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이후 대화가 단절되었다. 오래전 돌중의 저주가 생각났다.

“아! 그 망발의 앙갚음을 애들에게 하다니? 죽을 놈은 애들이 아니라 애비였어!” 아직 어린애가 무슨 인생을 알겠는가마는, 어쩌면 나보다 더 깊은 상처를 받고 힘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미도 그렇지, 명절이 되면 으레 아이들을 아비의 고향으로 보내야 하지 않는가? 삼손의 치명적 실언이 생각났다. 온몸에 진땀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 아버지의 전화가 왔다. 항상 벽에 붙여놓고 되뇌는 경구가 뇌리를 스치며 무안하게 다가왔다. ‘我旣死者 예수內住!(아기사자 예수내주!)’ 다시 일산으로 돌아왔다. 이미 죽은 자? 그놈이 다시 살아나 너무 밉고 역겨웠다. 처참하게 망가진 나를 보니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흥분된 자아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맞아죽을 놈! 남들처럼 쉽게 뒤질 수도 없는 놈이! 야, 이 미친놈아! 네가 예수를 믿는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접한 잡놈이!” 평생 듣고 본 막말의 구정물을 더러운 하수구로 마구 토해낼수록 진땀이 더 솟구쳐 올랐다. 그 자리에 나자빠져 벌러덩 드러누웠다. 다시 일어나 이리저리 배회하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밤 10시가 넘어 딸에게 전화하였다. 어제와 달리 한껏 기가 죽어 있었다. 못난 아비에게 크게 실망한 듯하였다.

내가 봐도 정말 가증스러운 애비였다. ‘그래, 맞아! 나는 구제불능이야. 아무리 봐도 믿는 자라고 할 수가 없어. 그저 한갓 더러운 짐승, 인간종일 뿐이야. 그것도 얼간이 망종!’ 9월 27일 자정,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이 창을 통해 역겨운 놈의 집구석을 쫙 비추었다. 달을 보자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베개를 등에 괴고 이불장에 기대어 성경책을 들었다. 애절한 하소연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송구합니다. 아이에게 퍼부은 저주를 저에게 몽땅 돌려주십시오.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백번 받아 마땅합니다. 이 부정하고 더러운 입술을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이후 입은 있어도 말을 못 하는 사가랴의 신세가 되었다. ‘보라, 내가 너를 정련하되 은처럼 아니하고 고난의 용광로에서 택하였다.’(이사야 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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