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미향 칼럼] 그때 그 시절

  • 입력 2022.12.01 10:36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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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향 사모(주님기쁨의교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인생 길에도 적잖은 만남이 있다. 세월이 가니 애경사에 봉투만 보내도 되는 곳이 있고 반드시 현장에 찾아가서 진한 위로나 기쁜 축하를 해줘야 할 사람이 있다. 결혼하면 남편 친구가 내 친구가 된다더니 진짜 실감하면서 산다. 남편 신대원 동기들 부부가 그렇고 이번엔 남편 젊었을 적의 교회 청년들이 그렇다. 지난주 그 시절 남편이 전도한, 인기 많던 청년이 장로 임직식 한다고 기쁨으로 뭉쳤다. 말은 여러 번 들었는데 처음으로 식후에 차를 마시며 35년이 넘은 추억들을 소환해왔다. 낼 모레 인생 60을 바라보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A가 B 장로님에게 “옛날에 일주일 좋아했었다” 고백했다. B 장로님 사모님도 그 자리에 있고 다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 젊은 날 다른 지역에 있었지만 ‘안 봐도 비디오’였다. 다 알아듣고 다 이해되어 웃음 났다. 목사님 딸은 너무 예쁘고 멋쟁이였다. 오빠한테(지금의 남편) 편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며,

나한테 “생긴건 촌스러워 가지고 답장을 안 하는 거 있죠. 촌스러워요, 그쵸?” 너무 솔직한 ‘아줌마’가 내게 정직한 동의를 구했다. 여간 어려운 일도 아니니 네! 맞아요! 진실로 답해줬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요즘은 잘 부르지 않지만 뜨거웠던 옛 노래, 추억 돋는 가사들이 툭툭, 줄줄이 나왔다. B 장로님은 내 청년시절, 내가 섬기던 교회의 C 오빠와 닮았다. 충청도 양반의 느린 말투 하며 나중에는 얼굴까지 닮아 보였다. 말할 때 요점 정리만 해서 전달하는 게 아니고 상대가 원하지 않은 정보를 오지랖 넓게 기승전결로 길게 말한다든가, 묻지도 않은 얘기를 주~욱 펼치며 이야기를 독점하는 것도 얄밉지 않았다. 학력고사 실패까지 우울했던 스무 살 무렵의 내 청춘도 돌아보니 교회에서 지내던 그때가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학교 공부야 비록 취미생활, 여가선용으로 헐렁했어도 교회학교 교사로, 성가대로, 대학청년부로 바쁘게 살았다. 우리 교회 C 오빠는 우리 학교 도서관을 이용했고 가끔 거기서 마주쳤다. 왜 남의 학교로 다녀? 묻지도 않았고 그뿐이었다.

어느 날 청년부 모임 중에 내 앞에 놓인 물컵을 보면서 “미향아, 너 이거 어디 쪽으로 마셨어?” 물었다. 다른 쪽으로 마시려고 묻는 줄 알고 정확히 “여기!” 했다. 그 오빠가 다시 확인하며 “요기?” 하더니 내가 마신 자리로 딱 맞춰서는 마시는게 아닌가? 애들이 웃고 야단법석. 나는 무안하고 어이없어서 같이 웃었다. 그때 그 시절 우리 교회 청년들은 다들 잘 살고 있는지, 지금 만나면 너무 늙어서 서로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닌지. 다들 할배가 된거 아닐까? 진짜 이러다가 천국에서 만나는 것 아냐?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한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내가 진짜 천국에 왔구나, 황송하다!’ 하면서 놀라고 “어머, 너도 왔니?”(못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왔쪄?), 근데(천국에 꼭 올 것을 기대했던) 우리 담임목사님이 안 보인다 아! 사람들의 평가는 이중적이고, 아무리 착해 보이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내게 악당인 사람도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 수 있다.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서 믿음이나 충성이 가볍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천국에서 만나기를 소망하며 기도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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