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동훈 칼럼] 예수나라 옴니버스

  • 입력 2022.12.15 13:17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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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목사.jpg

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아마데이스(Αmadeis)는 영적 진리를 배우지 못해 믿음의 기반이 부실하고, 성령의 인도를 깨닫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이른바 ‘무식한 자들’이다. 그 삶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이요 첩첩산중(疊疊山中)이며, 엎친 데 덮치고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한번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연거푸 꼬여 난맥상이 일어난다. 일사천리(一瀉千里) 만사형통(萬事亨通)을 추구하는 예수쟁이에게 더욱 혹독하게 다가온다. 바른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2년 10월, 일산으로 이사하였다. 카드깡으로 2,000만, 가등기로 5,000만, 사채로 3,000만 원을 마련하였다. 우선 급한 빚을 갚고 다른 채무까지 단번에 정리하기 위해 궁리하였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였다. 머지않아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장밋빛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사회 경험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놈이 찍새(싼 물건을 사서 되파는 자)로 승부수를 띄웠다가 정말 된통 찍힌 새가 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초, 공매로 매입한 임야에다 1,000만 원의 웃돈을 주고 공릉동 삼거리의 식당과 교환하였다. 친구의 언니를 소개받아 장사를 시작하였다. 반지하에 난방이 안 돼 견적을 받아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급매로 지역신문에 광고를 냈다.

1주일간 작정하고 거기서 기거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오, 주여! 이 식당만 팔리게 해주시면 술파는 가게는 평생 쳐다보지도 않겠습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딱 1주일 만에 24시 해장국집 사장이 찾아와 바로 계약하고 다음 날 인계하였다. 그리고 일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기도를 돌아서 바로 잊어버렸다. 오히려 서울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2003년 1월, 1,200만 원에 다른 임야를 얹어 주고 응암동 시장의 2층 카페를 찍었다. 문을 닫은 지 꽤 오래되었다. 서둘러 그 자매의 명의로 영업허가를 내고 사업자등록을 하였다. 식자재를 구입하고, 소주와 맥주를 들여놓고, 카드단말기를 임대하여 영업 준비를 마쳤다. 그때부터 일이 자꾸 꼬이기 시작하였다. 어렵게 마련한 자금을 다 까먹고 빚더미의 최고봉을 찍을 때까지, 나는 미련 방퉁이로서 그 약속을 깨닫지 못하였다. 카페를 오픈하자 IMF시절보다 더 심한 불경기와 강추위가 밀어닥쳤다. 거기서 밤을 지새우며 애썼으나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2월 초, 기습 한파로 수도와 하수구까지 얼어 터졌다. 주인이 해동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으나 업체를 불러 보수하고 상당한 비용을 치렀다.

‘그대는 고집이 세고 회개할 마음도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을 앞에 두고, 자기에게 임할 벌을 스스로 쌓고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2:5) 그때 매도한 임야에 문제가 생겼다. 한 등기에 두 필지가 등재된바, 작은 것은 2월 12일 카페 주인에게 확인서면으로 넘겨주고, 큰 것은 2월 21일 다른 사람에게 등기필증으로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등기를 신청하면서 두 필지를 다 이전하였다. 그리고 딴청을 피우며 배짱을 부렸다. 인간의 몰염치와 맘몬의 비정함을 새삼 맛보았다. 이후에도 파라오의 10가지 재앙을 더 받았다. 코뚜레를 당한 송아지처럼 나는 고수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정말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그리고 서서히 찍새 드라마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 물질의 옷을 입고 재물변작의 허공에 던져진 내 영혼의 비애여!”하나님의 징계와 사랑의 채찍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미루지 말고 지키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너는 약속한 것을 지켜라.’(전도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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