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그 시작과 현재를 생각하다

  • 입력 2016.10.20 09:25
  • 기자명 컵뉴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숙 총장
[프로필]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앞서 칼뱅의 개혁이 ‘종합적 목회’의 원형을 만들었고 그 종합적 목회의주 초점은 예배의 개혁과 삶의 개혁에 있었다고 했다. 예배의 개혁에 관해서는 간단하게나마 앞서 다루었으니 오늘은 삶의 개혁이 어떻게 종합 목회와 연결되는지를 살펴봄으로 칼뱅의 종교개혁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칼뱅은 듣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간직한 사람들에게는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 열매는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다(『기독교강요』4.1.10). 그래서 제네바에서 예배에 참석하고 정기적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시의회가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신앙교육에 데려오지 않는 부모에게 벌금을 과할 정도로 엄격했던 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기독교인의 삶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아는 것이 근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도 잘못될 수 있다. 그래서 훈련과 권징은 함께 가야 한다. 훈련이 없이 권징만 있다면 통제만 있는 살벌한 사회가 될 것이고, 훈련은 있는데 권징이 없다면 무질서한 사회가 될 것이다. 성도들의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ChurchDiscipline이라 한다.

 

 

이 말은 훈련과 권징을 동시에 포함할 때 그 효력이 발생한다. 현대 교회가 재판국의 설치와 그 효력에 대해 고민이 깊어진다. 온갖 이해관계로 구성된 재판국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데 재판의 효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은 사회법정에 맡기고 교회는 복음전도에 힘쓰자’라고도 한다. 그러나 자정 능력이 없는 교회가 밀려오는 죄의 유혹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제네바에서 훈련과 권징은 네 개의 기관이 네 개의 교회 직분과 함께 연결되어 이루어졌다. 네 개의 교회직분은 목사와 박사(교사), 장로와 집사이다. 목사는 제네바 목사회와 연결되었고, 박사는 교육기관인 제네바아카데미(현 제네바 대학교의 전신)와, 장로는 컨시스토리(Consistory)와, 집사는 종합병원(종합구빈소)과 일하며 제네바 성도들의 삶을 다양한 차원에서 도왔다. 제네바 목사회는 매주 금요일에 모여 목사들의 자격, 즉 성경이해와 복음적인 신학지식, 바른 삶의 모범을 확인하였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제네바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온 이들을 개신교 신학과 실천에 입각한 교육으로 인재들을 양성했다.

 

컨시스토리는 장로들과 당연직(exofficio)으로 참석하는 목사들이 매주 목요일에 모여 제네바 시민들 즉 성도들이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하고 상담하고 권징하였다. 제네바병원은 종합복지센터로 가난하고 연약한 자, 나그네를 돌보았다. 이 기관들은 제네바시가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사역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개신교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이를 통해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낸 제네바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의 박해를 피해 망명, 잠시 기거하며 제네바의 개혁을 몸소 체험하며 배운 존 낙스(John Knox)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학교”로 보였다. 필자는 구세군에서 헌아식을 받았고4~5세가 되었을 때 장로교로 이적하여 오랜 기간 장로교 교인으로 지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칼뱅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박사학위과정에 들어갈 때까지 칼뱅으로 논문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목회학석사(MDiv)과정에서 루터와 칼뱅의 글을 제법 읽었는데 그 때마다 루터의 열정적인 글이 논리 정연하여 다소 무미건조해 보이는 칼뱅의 글보다 좋았다. 그런데 박사학위 과정에서 칼뱅을 공부하면서, 특별히 논문으로 컨시스토리 회의록을 분석하면서 ‘목사 칼뱅’, ‘목사들의 목사인 칼뱅’을 만났다.

 

그리고 칼뱅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필자가 쓴 이전의 글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만 칼뱅은 그의 삶, 신학, 그리고 신학을 적용한 목회를 통하여 종합적으로 볼 때에야 바로 이해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칼뱅을 두고 상당히 다른 평가를 한다.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성시화운동’의 창시자로, ‘장로교의 시조’로 칭송하는가하면, 칼뱅 당대와 18세기 이후에 부쩍 많이 나온 반(反)칼뱅전기에 근거하여 칼뱅을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고 죽이기까지 한 냉혈인간, 반 기독교적 인간이라고까지 매도한다. 칼뱅은 프랑스계이민자로 제네바에 살면서(죽기 약 5년 전에야 시민권을 얻었다)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제네바에서 핍박을 감수하며 많은 일을 했고, 설교와 신학저술, 그리고 편지로 전 유럽에 흩어진 개신교도들을 격려하고 지원하였다. 정치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했던 연약한 목사 칼뱅을 다시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