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우리는 츠빙글리의 동역자들 중에서 재세례파가 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유아세례가 아닌 성인세례를 참 세례라고 하여 가톨릭교회나 개신교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정부와의 협력을 교회의 타락으로 보았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루터, 츠빙글리, 칼뱅 등의 개혁가들은 정부와의 협력을 도모하며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유럽대륙의 종교개혁이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도한 개혁의 동기가 왜곡된 신학과 타락한 교회을 바로잡고 개혁하는 정당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반면 영국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이들과는 사뭇 다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영국으로 가서 교회의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자. 영국의 종교개혁은 16세기 헨리 8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공식적’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이는 것은 이미 14세기에 존 위클리프 같은 신학자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매우 유사한 신학적 논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은 얀 후스에게 영향을 미쳤고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한 바 있다. 무사히? 죽음을 맞이하였던 존 위클리프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후에 화형된 바 되었다. 또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1490-1536)은 종교개혁자들이 했던 것처럼 자국 언어인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개혁의 선구자’들이라고 부른다.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차남으로서 똑똑하고 운동과 사냥을 좋아하는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형 아서(Arthur)는 1502년에 스페인의 공주 캐더린과 정략결혼하였으나 약 5개월 후에 병사하였다. 캐더린은 막강한 스페인의 공주로 종교개혁을 이룬 페르난도와 이자벨라의 딸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카를 5세가 그의 조카였다. 이런 이유에서 헨리7세는 차남인 헨리8세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캐더린과 결혼할 것을 유언하였고, 헨리8세는 6살 연상의 캐더린을 아내로 맞았다. 가톨릭교회의승인도 문제였고 자신을 위해 선택된 왕비가 아니었다는 것도 충분히 문제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생활이 처음부터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캐더린이 아들을 아예 못 낳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아들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결국 딸 메리만이 살아남았고 그의 나이는 더 이상 출산이 어렵게 되어갔다. 이에 아들을 기다리던 혈기왕성하고 초조했던 헨리8세는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과 재혼하고자 한다. 가톨릭교회는 이 이혼을 반대해야 했다. 말한 대로 결혼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 이런 이유에서 캐더린을 이혼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헨리는 자신의 신복들이자 인문주의와 개신교 신학으로 무장된 토마스 크랜머(ThomasCranmer)와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시켜 이혼을 가능하게 하였고 앤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