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그 시작과 현재를 생각하다

  • 입력 2016.11.18 17:54
  • 기자명 컵뉴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숙 총장
[프로필]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지난 호에서 우리는 츠빙글리의 동역자들 중에서 재세례파가 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유아세례가 아닌 성인세례를 참 세례라고 하여 가톨릭교회나 개신교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정부와의 협력을 교회의 타락으로 보았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루터, 츠빙글리, 칼뱅 등의 개혁가들은 정부와의 협력을 도모하며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유럽대륙의 종교개혁이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도한 개혁의 동기가 왜곡된 신학과 타락한 교회을 바로잡고 개혁하는 정당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반면 영국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이들과는 사뭇 다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영국으로 가서 교회의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자. 영국의 종교개혁은 16세기 헨리 8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공식적’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이는 것은 이미 14세기에 존 위클리프 같은 신학자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매우 유사한 신학적 논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은 얀 후스에게 영향을 미쳤고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한 바 있다. 무사히? 죽음을 맞이하였던 존 위클리프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후에 화형된 바 되었다. 또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1490-1536)은 종교개혁자들이 했던 것처럼 자국 언어인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개혁의 선구자’들이라고 부른다.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차남으로서 똑똑하고 운동과 사냥을 좋아하는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형 아서(Arthur)는 1502년에 스페인의 공주 캐더린과 정략결혼하였으나 약 5개월 후에 병사하였다. 캐더린은 막강한 스페인의 공주로 종교개혁을 이룬 페르난도와 이자벨라의 딸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카를 5세가 그의 조카였다. 이런 이유에서 헨리7세는 차남인 헨리8세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캐더린과 결혼할 것을 유언하였고, 헨리8세는 6살 연상의 캐더린을 아내로 맞았다. 가톨릭교회의승인도 문제였고 자신을 위해 선택된 왕비가 아니었다는 것도 충분히 문제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생활이 처음부터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캐더린이 아들을 아예 못 낳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아들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결국 딸 메리만이 살아남았고 그의 나이는 더 이상 출산이 어렵게 되어갔다. 이에 아들을 기다리던 혈기왕성하고 초조했던 헨리8세는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과 재혼하고자 한다. 가톨릭교회는 이 이혼을 반대해야 했다. 말한 대로 결혼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 이런 이유에서 캐더린을 이혼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헨리는 자신의 신복들이자 인문주의와 개신교 신학으로 무장된 토마스 크랜머(ThomasCranmer)와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시켜 이혼을 가능하게 하였고 앤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다음 해인1534년 스칸디나비아 왕조의 경우를 따라 자신을 영국의 왕일뿐만 아니라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천명하는 수장령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그는 가톨릭교회와 결별하였다. 우리에게 성공회로 익숙한 영국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의 시작이다. 헨리8세는 이 일이 있기 23년 전인 1521년, 대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개신교 신학에 대응하여 가톨릭교회의 7성례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이에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라는 타이틀을 하사하였다. 보다시피 그의 결별은 신학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가 가톨릭신앙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틴데일이 꿈꾸었던 영어성경 출판을 허락했고 커버데일(Mikes Coverdale)의 성경을 교회에 비치하게 하면서 개신교적 가치를 받아들었다. 또한 개신교였던 크랜머 대주교가 자신을 이은 에드워드 6세(1537-1543, 왕위1547)의 보좌를 맡게 하였다. 크랜머의 지휘 아래 영국국교회가 빠른 속도로 개신교로 변모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는 6년 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큰 이복누이인 메리가 왕좌를 계승하면서 영국의 종교교혁은 허사가 되는 듯 했다. 지금쯤 독자들 중 에드워드가 누구냐고 묻는 분도 있겠다. 에드워드는 헨리8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다. 헨리8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두 번째 부인 앤을 사형한 후, 4번 더 결혼했는데 그 중세 번째 부인인 제인에게서 에드워드를 얻은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그는 딸들을 포함한 왕위계승 순서를 정해놓았기에 메리와, 또 그를 이어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계속>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