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그 시작과 현재를 생각하다

  • 입력 2016.12.23 10:18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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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숙 총장
[프로필]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정식 이름은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and Northern Ireland이고 줄여서 United Kingdom, UK라고 부른다. 굳이 번역하자면 ‘대(大)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겠다. 여기서 대 브리튼은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그리고 웨일즈(Wales)이다. 흔히 영국이라고 생각하는 ‘잉글랜드’는 지금의 영국이 되기 위한 출발점이고 4개의 소왕국 중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한다. 이 왕국들은 17세기 초 처음으로 연합왕국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연합체가 그러하듯이 연합왕국으로서 영국은 근사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사정은 사뭇 복잡하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맞서 싸운 배넉번 전투 700주년을 기념하는 2014년 8월에 16세 이상의 모든 스코틀랜드 주민을 대상으로 분리 독립을 위한 투표를 실시한 바 있다. 비록찬성 45%, 반대 55%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영국 안에서 구 왕국들은 각각 독립의 꿈을 쉽게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하다.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영국이 아직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나눠져 있을 때 개신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헨리 8세의 조카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5세는 루터를 비롯한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이 커져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개신교핍박으로 정책의 기조를 삼았다. 프랑스 기즈(Guise)가의 메리 사이에서 얻은 딸 메리는 생후 6일 만에 선왕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여왕에 오르지만 실제로는 섭정이 이루어졌고, 5살 되던 해에 정치적인 이유에서 프랑스로 보내져 자라다가 약 16세의 나이에 프랑소와 2세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이듬해에 프랑소와 2세가 갑자기 죽게되자 그 이듬해인 1561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여왕이 된다. 이 시기 유럽대륙은 이미 종교개혁의 2세대들이 활동하던 때였고, 영국에서도 엘리자베스여왕의 집권으로 종교개혁이 나름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안정 기조로 들어가는 때였지만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처럼 가톨릭의 세를 굳혀갈 듯이 보였다. 이러한 스코틀랜드를 개혁한 이는 존 녹스(1513~1572)이다.

 

신학자요 목사로 개신교 종교개혁에 뛰어든 존 녹스는 갤리선 감옥을 거쳐 1549년에 영국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에드워드6세 때 궁정목사로 임명되어 영국 국교회가 개신교적 신학과 형태를 갖는데 한 몫을 하지만, 메리여왕이 권좌에 오르면서 영국이 가톨릭교회로 선회하자 공직에서 사임하고 제네바와 프랑크푸르트로 가게 된다. 제네바에서 녹스는 칼뱅의 신학과 목회를 경험적으로 이해했다. 그 자신도 영국난민들에게 목회할 수 있는 기간(1556년~1558년)을 가졌다. 그가 예배를 인도한 건물은 칼뱅이 목회했던 생피에르교회와 2~3분 거리에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같은 건물에서 칼뱅은 목사들은 위한 정기적인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시작하기도 했다. 존 녹스가 제네바에 머물렀던 기간은 존 녹스에게 뿐만 아니라 제네바 시민들에게도 의미가 있었던 기간이었다. 이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존 녹스가 제네바를 가르쳐 “그리스도의 완벽한 학교”라고 격찬하고 제네바교회의 모델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세우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제네바인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제네바 종교개혁공원에 부조로 남겨진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네 사람의 부조에 녹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그 증명이리라. 존 녹스는 세 명의 메리 여왕들(잉글랜드의 메리여왕,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 그의 어머니 기즈가의 메리왕비)을 겨냥하여 여성은 나라를 다스리기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공격하였다. 이 세 여왕의 공통점은 가톨릭교도였고 그들 중 누구도 바람직하게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없지만 이들이 여자라서 몰아붙인 것은 전형적인 여성혐오 발상이라고 두고두고 비판받게 되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의회가 개신교를 지지하면서 존 녹스가 주도하였던 종교개혁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와 『치리서』가 채택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9세기 중엽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생길 때까지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교회가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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