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그 시작과 현재를 생각하다

  • 입력 2017.01.25 11:08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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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숙 총장
[프로필]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지난 호는 2017년을 맞아 원래 목차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종교개혁500주년 새해 묵상으로 대신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목차를 따라 개신교종교개혁이 시작된 16세기 가톨릭교회의 개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톨릭교회의 개혁은 두 가지의 개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스스로의 개혁(Catholic Reformation)과 개신교 개혁에 대응하여 시도한 개혁, 반(反. 혹은 대항)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이다. 가톨릭교회의 개혁은 중세 천년의 기간 동안 꾸준히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10세기에 있었던 베네딕투스파의 클뤼니수도원의 개혁운동은 베네딕투스의 원래 정신을 회복하여 수도원과 교회를 개혁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에게는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아시시(Assisi)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세운 프란체스코회나, 중세 최고의 신학자로 알려진 토마스 아퀴나스가 속했던 도미니크회가 세워진 것도 수도원 개혁운동의 결과였다.

 

그러나 14세기에 일어나 대분열(Great Schism 1378~1409년)을 경험하고 15세기에 이르렀을 때 교황의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교회에 대하여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서 교황주의의 대안으로 공의회수위설(公議會首位說 conciliarism)이 제시되었다. 공의회수위설은 공의회(Council)가 교회와 관련된 주요논의를 하고 결정하는 체제를 말하는데 이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공의회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삼위일체를 재확인한 니케아공의회(325년)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재확인하여 기독론을 정립한 칼케돈공의회(451년) 등이 그 예이다.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의 위계적 구조를 민주적인 구조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공의회수위설은 바젤공의회(1431~1447년)에서 거부되었고 교황권이 재확립되었다. 만약 이 때 공의회주의자들이 이겼다면, 교황은 공의회에 예속되었을 것이고 그는 공의회의 결정을 집행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치 장로교회의 총회에서 총회장(moderator)의 역할처럼 회의를 주재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역할을 할 뿐,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라는 절대적 권위로 교회의 주요결정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공의회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를 바꾸지 못했지만 개신교 개혁자들에게 교황을 비판할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외에도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위해노력한 사람들은 많다. 우리에게는 개혁의 선구자로 가톨릭교회에게는 이단이 된 영국의 위클리프나 체코의 얀 후스,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에라스무스 같은 이들이 있다. 루터의 신학에 분명하게 선을 그었던 에라스무스였지만 그의 모든 책들은 16세기 중엽 가톨릭교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 개신교교회의 등장과 빠른 확산에 위기감을 갖고 대처한 개혁을 반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이라 부른다. 반종교개혁은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 확인된다.

 

트렌트공의회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의 요구에 의해 마련되었다. 사실 카를 5세의 위기감은 당시 교회지도자들의 그것보다 더 정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조속하게 공의회를 소집하자고 요구했는데 교황은 혹여 공의회주의가 되살아날까 염려하여 공의회를 열지 못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1545년(이 때는 루터가 죽기 약 1년 전이었고, 칼뱅이 제네바에 다시 입국한 지 3년이 된 때였다)에야 트렌트공의회가 열렸고 1563년까지 계속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간헐적인 회의를 통하여 개신교에 대응하는 가톨릭교회의 주요 결정과 실천 강령을 마련하였는데 신학적으로는 개신교가 주장한 것들을 대부분 부정하였고, 제롬이 번역한 불가타 성경을 가톨릭교회의 유일한 역본으로 정하였다. 실천적으로 목회자의 교육을 강화하고 목회자가 교구에 거주할 것과 교구를 복수로 맡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면죄부의 잘못된 폐습을 바로잡는 등 목회적 개혁에 적극 임하였다. 이 결정의 대부분은 1962년에 열려 1965년에 마쳐 현대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바티칸 제2공의회까지 유지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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