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환 칼럼] 눈물로 씨 뿌리기(1)

  • 입력 2023.01.06 08:49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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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환 목사.jpg

조예환 목사(갈보리교회) 

[프로필]

▣ 총회부흥사회 대표회장 역임

▣ 한국기독교영풍회 대표회장 역임

 

 

한번 기울어버린 집안 살림은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늘 옷을 차려입고 나가셨지만 되는 일이 없었고 한 번도 돈을 벌어 오시지 못했다. 우리 형제들은 두세 살 터울로 줄줄이 있었고 그때는 의무교육이 아니라 등록금을 다 내야 했다. 등록금을 못 내 교무실에 불려가고, 등록금 가져오라고 아예 집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지만, 집에 와서 등록금 달라고 부모님을 졸라본 기억은 없다. 졸라서 될 어떤 가능성도 없는 가난 속에 살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집에서는 참고서 한 권 사주신 일이 없었다. 아이들이 당시 완전 정복이다 필승이라 하는 커다란 참고서로 공부하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 책 한 권만 있으면 정말 공부를 잘할 것 같았다. 당연히 학원에 다니거나 한 일도 없다. 학교에 갔다 오면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부업을 해야 했다. 드라이용 솔빗 끝을 촛불에 그슬려 뭉툭하게 하는 일로 온 집안이 플라스틱 타는 냄새로 자욱했고, 실밥을 따는 먼지에 다들 기침이 났다. 그렇게 각종 부업을 안 해본 것이 없다. 아무리 용무가 급해도 공중화장실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던 그 가난이 얼마나 사무쳤던지 나는 성도들이 제발 가난하지 말았으면 싶다.

하나님께서 복 받을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성도들을 보면 누구보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가슴 깊은 밑바닥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것은 어린 자식들을 책임져 주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한 분노와 닿아 있다. 어머니는 낮 동안 내내 나가서 고된 일을 하고서도 동네에 부흥회 포스터가 나붙으면 얼른 씻고서 교회로 달려갔다. 그렇게 고단한 삶 속에서 어머니는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 유일한 낙이고 회복이고 희망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말씀을 들으며 조는 일이 없다. 오히려 어머니의 눈은 예배 시간 더욱 초롱 해지고 가장 큰소리로 “아멘” 하신다. 예배가 어머니에겐 살아가는 산소 같은 것이었다. 힘들고 지칠수록 큰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회복하는 어머니셨다.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체험의 신앙을 가지셨기에, 어머니는 때로 깊은 은혜 속에서 자신을 치유하셨고, 그 힘으로 고난을 이겨내셨다. 우리 형제들은 동네에 부흥회 포스터가 붙은 걸 보면 덜컥 겁부터 났다.

어머니가 보기 전에 포스터를 몰래 떼어버린 일도 있다. 어머니가 가셔서 또 뭔가 헌금을 작정하고 오실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작정한 헌금을 내느라 우리는 갑절의 부업을 해야 했으니까. 어머니는 우리에게 어떤 교육적 혜택도 주시지 못했고, 다섯 남매 최소한 배 골리지 않고 비 맞지 않도록 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대신 새벽으로 밤으로 기도하셨다. 때로 말썽을 부려도 한 번도 야단치신 적이 없다. 언젠가 학교로 말썽을 부린 친구들의 부모님이 다 불려 온 일이 있었다. 다른 부모님들은 때리고 울고 야단치고 난리를 하셨지만, 나의 어머니는 손을 꼭 잡고 조용히 기도하시는 게 꾸지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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